생각이 있는 이야기 102

좋은집 만들기

좋은집 만들기 가장 적절한 천장의 높이는?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는 말이 있다. 맞는 말이지만, 여기에는 하나의 전제가 필요하다. 적당한 크기로 잘라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입을 크게 벌리지 않아도 되고 또 품위 있게 씹을 수 있다. 물론, 넘길 때도 편하다. 집도 그렇다. 적당한 크기가 있다. 방이나 거실, 마당과 뒷간의 크기와 높이, 넓이를 적당히 조절해야 ‘딱 좋은’ 집이 될 수 있다. 한옥에 들어가면 ‘아늑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초가뿐 아니라 ‘고래등같은 기와집’에서도 이런 느낌은 마찬가지다. 그 이유가 뭘까. 한옥은 담부터 벽, 중문, 창문, 퇴, 기단 등이 모두 사람의 몸과 어울린다. 그렇게 크지 않다. 몸에 맞는 옷처럼 적당하다. 우선 방을 보면, 99칸 집도 막상 방은 그리 크지 ..

물질 만능주의 해결방안

물질 만능주의 해결방안 렌즈를 빼라 ‘기복신앙’ 현대 기독교를 규정할 때 반드시 동원되는 단어다. 교회 안과 밖 모두에서 이견이 없다. 기복신앙은 물질주의를 의미한다. 신앙과 돈을 연결시킨다는 점에서 교회의 내적 붕괴를 가져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럼에도 지금도 교회에서는 이런 신앙이 만연하다. 물질이 가장 유용할 때는 ‘과시’다. 중세 도시들이 그러했다. 그들은 종교를 명목으로 돈을 모아 도시의 영화를 과시하는데 썼다. 방법은 간단했다. 으리으리한 건물을 지어 올리는 것이었다. 신앙이라는 명분이 있었기 때문에 개인의 허영과는 다른 문제로 분류되어 모든 부분에서 차고 넘쳐도 상관하지 않았다. 중세 유럽의 도시들에는 (카톨릭) 고딕 성당이 우후죽순처럼 솟았다. 이런 현상의 시작은 1140년 생 드니 ..

한일 청구권

한일 청구권 알 듯 모를 듯 ‘한일 청구권 협정’ 1965년에 한일 청구권 협정(韓日請求權協定)이 체결됐다. 합의내용을 자세하게 들여다보면 이렇다. 1) 일본은 한국에 대해 조선에 투자한 자본과 일본인의 개별 재산 모두를 포기한다. 2) 3억 달러의 무상 자금과 2억 달러의 차관을 (한국에) 지원한다. 3) 한국은 대일 청구권을 포기한다. 우리나라 사람과 한일 청구권 협정이란 말을 마주쳤을 때 연상하는 단어는 사뭇 다르다. 우리는 ‘식민지’, ‘수탈’ 같은 단어를 떠올리지만, 일본은 전혀 다른 어감의 ‘식민지’를 떠올릴 뿐이다. 한일 청구권 협정의 뿌리를 살펴봐야 한다. 샌프란시스코조약이다. 샌프로시스코조약에는 ‘식민지 지배 책임’을 묻는 조항이 없다. 실수였을까? 아니다. 1947년에 체결된 연합국과 ..

일제 토지 조사 사업

일제 토지 조사 사업 조선총독부가 조선에서 거둔 세금의 66%를 차지하는 이 항목 “누가 주인인 거야?” 한국인들은 토지에 여러 가지 권리를 인정했다. 기본적으로 토지의 주인은 국가였고, 소유자는 물론 그 땅에 직접 농사를 짓는 사람도 일정한 권리를 인정받았다. 침략자의 입장에서는 여간 복잡한 시스템이 아니었다. 이들은 이를 일거에 해결할 필요가 있었다. 조선총독부가 실시한 토지조사사업은 소유권을 명확하게 해 식민지를 안정적(?)으로 통치하고 일본인들의 이주를 권장하는데 목적이 있었다. 국전제는 폐지되었고, 여러 권리가 중층적으로 적용되던 토지는 이제 하나의 소유권만 인정하게 됐다. 제도의 변화 때문에 토지 소유자가 아닌 실제 경작자는 아무런 권리도 인정받지 못했다. 이 과정에서 농지를 포함한 대규모의 ..

강릉 단오제 유래

강릉 단오제 유래 '端午'가 얼마나 많이 있을까 중국인들은 단오(端午)에 3일 동안 쉰다. 한국 덕분이다. 2005년 ‘강릉단오제’가 유네스코 세계 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되면서 중국에서는 강력한 반발이 일어났다. ‘강릉단오가 중국단오를 훔쳐갔다.’ ‘왜 남의 문화를 유네스코에 등재시켰는가.’ 한국에 자극을 받아 2008년에 단오절에 3일 동안 쉬도록 법정 공휴일로 지정했다. ‘단오(端午)’라는 단어를 같이 쓰지만 강릉단오와 중국단오는 다르다. 중국단오는 자살한 사람을 기리는 날이다. 중국인들 진나라가 초나라의 도성인 영성을 빼앗은 데 격분해 강물에 뛰어든 굴원을 기리며 축제를 즐긴다. 자실 시도 직후 굴원을 구하러 급히 배를 노를 저었던 이야기를 바탕으로 용선대회를 연다(중국단오의 영어 명칭은 Dragon ..

조직적응력

조직적응력 괴물들의 사회 사람은 결국 적응한다. 처음에는 호흡이 곤란해진 정도로 충격적인 일에도 차차 적응한다. 보통의 생각과 느낌으로부터 지나치게 멀어지면 괴물이 된다. ‘망나니’가 그랬다. 조금 어려운 말로는 회자수라고 했다. 사형집행자였다. 을사사회(1545) 때 목숨을 잃은 윤준은 괴물 망나니를 경험했다. 사형을 앞두고 회자수가 돈을 요구했다. 윤준은 “돈을 준다고 내가 안 죽겠는가!”하고 대답했다. 망나니는 그를 가장 고통스럽게 죽였다. 이긍익의 에 등장하는 이야기다. 비슷한 예로 순조 임금의 능을 잡은 지관 이시복의 처형을 들 수 있다. 사형을 한 후에 그의 시신을 확인해 보니 난도질이 되어 있었다. 1835년 3월16일자 ‘승정원 일기’에 나오는 내용이다.저자가 알려져 있지 않은 ‘임술록’에..

명나라 영토

명나라 영토 명나라 한족 ‘**’들이 만주족을 지배층으로 받아들인 이유 “우리는 오랑캐 만주족을 몰아내고 한족의 나라를 되찾겠다.” “만주족은 한 명도 살려두지 말고, 한족은 한 명도 해치지 말라.” 태평천국운동을 이끈 홍수전(1814~1864)가 남긴 말이다. 중국은 (지금) 한족의 나라다. 과거 내란이 일어났을 때 한족과 오랑캐의 대립은 극명했다. 서구인들이나 우리나라 사람이 보면 티벳인, 위구르인, 몽골족이나 사뭇 달라 보일까, 그 사람 그 사람이지만 자기들끼리는 엄청나게 구분한다. 그러나 조금 더 파고 들어가면 이보다 큰 문제가 있다. 돈 문제다. “이 자가 내 돈을 빌려놓고 갚지 않습니다!” 17세기 중국, 역졸 하나가 실직을 당했다. 고리대금업자에게 돈을 빌렸다고 못 갚은 까닭이었다. 그는 채..

상하이 역사

상하이 역사 상하이의 빛과 그림자 경제도 사람이 하는 일이지만 그럼에도 비교적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현상이 있고 억지스럽기 짝이 없는 일도 있다. 아무리 그럴싸한 계획과 자본 투입이 있어도 후자는 대부분 실패로 귀결된다. 상하이의 흥망성쇠가 이를 잘 보여준다. 우선 상하이의 탄생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상하이의 근대화는 황푸강변에 번드(bund)에서 시작됐다. 힌두어로 제방, 중국어로는 ‘와이탄’이었다. 19세기 영국이 동아시아 각지로 침투하면서 생긴 ‘항만 거주지 특유의 수변 지역 공간’을 의미했다. 배가 닿고 사람과 물건이 오르내리는 공간은 자연스럽게 사업과 경영의 중심지가 되었다. 상하이도 다르지 않았다. 반드를 중심으로 4개의 큰 길이 닦였다. 30년 뒤인 1870년대에는 영국대사관과 프랑스영사관..

세계 경제 대공황

세계 경제 대공황 1929년 대공황, 이를 극복하려고 일본은... 1929년의 대공황은 ‘잘 나가던’ 일본까지 뒤흔들었다. 일본은 경제를 살리기 위해 나름의 전략을 짰다. 그것은 일본 돈의 가치를 높이는 것이었다. 그들은 황금을 수출하는 등 다양한 방법을 동원했다. “성공했다!” 1차 목표 달성에 성공했다. 그러나 궁극적인 목표는 오히려 더 멀어졌다. 엔화 가치 상승은 일본 상품의 가격을 올렸고, 이는 다시 불황을 불러왔다. 수출로 먹고 살던 일본 기업들이 파산했다. 1930년, 820개 일본 기업이 문을 닫았고, 수출액은 31% 줄었다. 실업자 300만, 대학 졸업생 중 70%는 실업자가 됐다. 그리고 1931년 만주사변이 일어났다. 경제 불황을 전쟁으로 돌파하려 한 것이었다. 이들의 목표는 거대한 중..

건강한 사회

건강한 사회 서태후의 줄타기 ‘의화단 운동(義和團運動). 청나라 말기 1899년 11월 2일부터 1901년 9월 7일까지 산둥 지방, 화베이 지역에서 의화단(義和團)이 일으킨 외세 배척 운동.’ 이들은 중국 내 서양인들에 대해 무참히 살해하거나 서양 종교를 믿는 중국인들마저 배신자로 간주해 산 채로 땅에 묻기도 했다. 이들의 폭주는 나름의 ‘근거’를 가지고 있었기에 청나라 조정마저도 애매한 태도를 취하게 했다. “저들(의화단원)은 매우 충성스럽고 훌륭한 애국자들이다.” “우리는 의화단을 돕지 않는다. 그리고 의화단이 외치는 것처럼 결코 서양을 적대하지 않는다. 그러니 당신들(서양 각국 대사관)도 의화단 문제로 청나라에 대해 적대행위를 하지 마라.” 청나라의 입장에서는 의화단과 서구세력 모두 견제 세력이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