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이 있는 이야기 102

기억술

기억술 그들은 모든 것을 아는 것처럼 보일 뿐 문자는 인류에게 너무도 익숙한 것이지만 이전 시대는 그렇지 못했다. 인쇄술이 발달하고 나서도 문자는 한동안 명백한 기억보다 불편하게 여겨졌고, 그 이전은 말할 것도 없었다. 저물어가는 ‘기억(기억술)의 시대’에 대한 쓸쓸한 독백이 있었다. 빅토르 위고가 쓴 ‘노트르담의 곱추’(1831)에 나오는 내용이다. 한 학자가 인쇄된 책을 집어들고 성당을 바라보며 중얼거린다. “새로운 것이 옛것을 사라지게 할 것이다.” 새로운 것은 기억을 담은 책이었고 옛것은 기억술이었다. 고대로부터 이어진 기억술은 성당 같은 ‘공간’과 깊은 연관이 있었다. 기억술은 그리스의 서정시인 시모니데스(BC 550-468)였다. 키케로는 그의 기억술을 이렇게 설명했다. ‘그는 이 능력을 키우..

인도인

인도인 인도인들의 이중생활 ‘이 도시는 국가라는 토양으로부터 난 나무처럼 성장하지 않았다... 마치 시간이라는 조류 위의 거품처럼 떠도는 듯하다.’ - 타고르(1861-1941) 1931년 미얀마 양곤 인구의 절반이 인도인이었다. 중국, 유럽인도 있었지만 외국인 중 인도인의 수는 압도적이었다. 중국은 아시아 곳곳에서 밉상이었으나 미얀마에서만은 달랐다. 인도인에 비해 그 수가 적었던 것이다. 상대적으로 존재감이 미미했다. 인도인들은 영국 제국주의자들의 정책을 따라 양곤으로 이주했다. 이들은 자국에서 식민지 백성이었으나 양곤에서는 상대적으로 우월적 지위를 누렸다. 영국을 등에 업고 버마인(미얀마인)들을 착취하고 있었다. (타고르는 이런 모습에 너무도 깊은 실망을 느꼈다.) 미얀마가 독립했을 때 식민지 시기와..

믈라카

믈라카 국가란 무엇인가 개 한 마리가 쥐사슴을 쫓고 있었다. 자바쥐사슴의 크기는 다 커도 몸무게가 1kg 남짓. 개에게는 한입 거리밖에 안 됐다. 위기의 순간 쥐사슴이 돌연 폴짝 뛰어 개에게 덤벼들었다. 갑작스런 공격에 당황한 개는 강에 빠져버렸다. “그래, 저거야!”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파라메스와라 왕자가 자신도 모르게 외쳤다. 그는 그 작은 쥐사슴처럼 쫓기고 있던 신세였다. ‘말레이 연대기’에 의하면 그는 수마트라 지역의 스리위자야 제국의 왕자였다. 자바의 마자파핫 왕국으로부터 공격을 받아 도망치고 있었다. 그는 새롭게 정착할 곳을 찾아 헤매다 1402년 믈라카에 닿았다. 믈라카는 작은 어촌 마을에 불과했으나 그에게는 쥐사슴처럼 느껴졌다. 크기는 작았지만 지리적 이점이 컸다. 그는 믈라카에 왕국..

아내

아내 무산에 산다는 그녀 ‘아내는 옷에 묻은 술 자국이 많다며 화를 내셨네.’ 목은 이색(1328-1396)이 어느 해 겨울 남긴 기록이다. 과음했다지만 핑계는 있었다. 이름난 재상들과 높은 관리들과 무리를 이루어 공민왕의 무덤인 현릉을 참배했다. 돌아오는 길에 여러 차례 술자리가 있었고 주거니 권하거니 ‘사회 생활’을 하느라 취하도록 마시지 않을 수 없었다. 아내는 이런 남편에게 화를 냈다. 결코 만만치 않은 지위에 명분도 있었지만 ‘무서운 아내’의 지청구는 피할 수 없었다. 이중민이라는 인물이 있었다. 그는 아내의 치마를 바느질해서 꿰맸다. 이 일이 어쩌다 친구의 귀에 들어갔다. 그의 친구 이규보는 멋들어진 시를 지었다. (시는 ‘동국이상국집’ 5권에 남았다.) ‘눈빛처럼 곱네 하얀 비단 치마 밟아서..

베르타 폰 주트너

베르타 폰 주트너 하버드는 왜 그럴까? 베르타 폰 주트너(1843-1914).독일 출신으로 1905년 노벨평화상을 탔다. 여성으로서는 최초의 기록이었다. 유로화가 통용되기 전에 오스트리아의 가장 고액지폐인 1000쉴링에 얼굴이 실렸고, 현재는 2유로 주화에서 그의 얼굴을 볼 수 있다. 이 여성은 대한제국 혹은 조선에 중요한 사건이 벌어질 때마다 목소리를 높였다. 1909년에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했을 때가 특히 그랬다. 그 사건은 유럽을 충격에 빠뜨렸다. 그런데 그 이유가 우리 생각과 사뭇 다르다. 당시 이토 히로부미는 세계적으로 인정을 받는 거의 유일한 아시아 정치인이었다. 이런 뛰어난 정치인을 잃어버린 것에 대해서 충격을 느끼고 애도하는 분위기였다. 영국은 크게 당황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집단

집단 스승과 제자 김종직은(1431-1492)은 아내를 선비라고 불렀다. 시구에 들어간 단어였다. 김종직이 몸이 안 좋아 집에 있던 날, 아내가 국화주를 내와다. 당시는 흉년으로 술값이 뛴 즈음이었다. 국화주 석 잔을 마시고 나자 시가 절로 흘러나왔던 모양이었다. ‘아내는 참으로 단정한 선비시네 노랑 국화가 향기도 국중의 제일이라네.’ - ‘점필재집 시집’ 제19권 술 한잔 값만은 아니었다. 평소 김종직은 아내에게 예와 정성을 다했고, 아내의 평소 언행과 성품을 존경하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선비와 같았다. 김종직이 결혼생활에 정성을 쏟은 것은 아버지 때문이었다. 아버지 김숙자(1389-1456)는 젊은 시절 집안 어른의 명을 따라 공산 한씨와 결혼해 아들 둘과 딸 하나를 낳았으나, 신분상의 허물이 있..

노예

노예 백인 하인들과 함께 시위에 참가한 흑인 노예들 “직업이 무엇이오?” “직장인... 아니 노비요.” 어느 예능 프로그램에 등장한 장면이다. 공감 버튼을 많이 받았다. ‘온전한’ 자유를 억압받는다는 점에서, 그리고 ‘갑질’에 완벽한 저항이 힘들다는 면에서 요즘 직장인들이 과거의 ‘대감댁 노비’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은 듯. 미국 흑인 노예의 역사를 보면 다양한 형태의 ‘노비’들이 존재했다. 대개는 흑인만 떠올리지만 인종적으로 보면 황인종, 백인도 노비 신세를 변하지 못했다. 이들의 면면을 간단하게 살펴보면 ‘노예’ 혹은 ‘노비’의 실체를 어느 정도 규명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아메리카 최초의 노예들은 원주민이었다. 영국인들은 스페인인들의 선례를 따라 원주민을 노비로 삼았다. 이 시도..

중인

중인 개화기는 ‘그들’의 시대였다 개화기에 접어들자 철학의 시대는 급격히 저물었다. 기술로 무장한 서구 세력이 쳐들어오면서 변화의 몸부림을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고고한 철학에서 기술과 실리의 세계로 전환, 그것이 개화기의 풍경이었다. 제2 신분집단이 급부상했다. 중인들이었다. 1880년 통리기무아문이 설치된 이후 외무아문의 주사 자리를 놓고 치열한 경쟁이 벌어졌다. 이 자리는 중앙정부에 진입하는 거점이었고, 주사의 10% 이상을 중인이 차지했다. 외무아문의 업무 특성상 통역 등 외교의 전문성이 중요했고 이는 중인들이 오랫동안 활약한 분야였다. 외무아문에서 1883년에 세운 ‘동문학’, 그리고 ‘동문학’의 위상과 역할을 이어받은 ‘육영공원’에서 가장 모범적인 태도로 외국어 학습에 임한 사람들은 중인들이었..

애덤 스미스

애덤 스미스 순진한 스미스 씨 아메리카의 발견, 그리고 희망봉을 돌아 동인도제도로 향하는 바닷길을 개척 이후 유럽인들은 살기 좋은 세상을 만났다. 그들은 압도적 기술력 등을 앞세워 아시아 국가들을 제압하다시피 했다. 이는 비유럽권 사람들에겐 불행이었다. ‘이 두 발견이 이루어지던 특정한 시기에 유럽인들의 힘의 우월성은 너무나 확연하여 그들은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지역들에서 아무런 제재도 받지 않고 온갖 불의한 일들을 저지를 수 있었다.’ - 애덤 스미스, ‘국부론’ 그 시절 중국이 겪어야 했던 일들을 대부분 비극이었다. 한때 중국은 애덤 스미스에 따르면 ‘세계에서 가장 부유하고, 땅이 비옥하고 잘 경작되어 있으며, 사람들도 근면하고 인구도 조밀한 나라’였다. 정화의 원정(1차 1405~1407, 7차 ..

세습

세습 아무리 양반이라도 마음대로 안 되는 것 양반은 태어날 때부터 확실히 유리했다. 지방이든 서울이든 양반이라는 신분만 쟁취하면 군포와 요역에서 면제를 받았다. 사액 서원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다양한 의례를 통해 양반의 기득권을 확인시키고 또 보장받았다. 양반이 좋았다. 양반만으로도 좋았기에 문과 급제의 예비단계 격인 생진시 합격도 의미가 있었다. 그곳에만 합격해도 양반으로 인정을 받았다. 그럼에도 세습되는 권력이라고만은 할 수 없었다. 그들이 진출한 관료 사회는 단순히 출생만 가지고 잘 먹고 잘살 수 있는 세계가 아니었다. 능력을 보여주어야 했다. 이는 출생으로 그저 얻은 신분 정체성을 상쇄하는 경우가 많았다. 반대로 한미한 집안임에도 높은 자리까지 오르기도 했다. 관료제의 핵심은 성과와 공로였다. 비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