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단
스승과 제자
김종직은(1431-1492)은 아내를 선비라고 불렀다. 시구에 들어간 단어였다. 김종직이 몸이 안 좋아 집에 있던 날, 아내가 국화주를 내와다. 당시는 흉년으로 술값이 뛴 즈음이었다. 국화주 석 잔을 마시고 나자 시가 절로 흘러나왔던 모양이었다.
‘아내는 참으로 단정한 선비시네
노랑 국화가 향기도 국중의 제일이라네.’
- ‘점필재집 시집’ 제19권
술 한잔 값만은 아니었다. 평소 김종직은 아내에게 예와 정성을 다했고, 아내의 평소 언행과 성품을 존경하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선비와 같았다.
김종직이 결혼생활에 정성을 쏟은 것은 아버지 때문이었다. 아버지 김숙자(1389-1456)는 젊은 시절 집안 어른의 명을 따라 공산 한씨와 결혼해 아들 둘과 딸 하나를 낳았으나, 신분상의 허물이 있다는 이유 때문에 집안 어른들이 한씨를 친정으로 돌려보냈다.
이 일은 두고 두고 김숙자의 발목을 잡았다. 1419년 문과에 급제했고 이듬해에 밀양 박씨와 결혼했는데, 다음 해에 사단이 벌어졌다. 공산 한씨 집안의 사람들의 상소를 올려 김숙자의 이혼 이력을 문제삼았다. 이후 김숙자는 늘 변변찮은 자리를 전전하거나 초야에 묻혀 지냈다. 그 바람에 공부하고 수양할 시간이 많아져 도학자로서 이름을 드높였으나 늘 마음 한 구석이 아쉽고 서운하지 않았을까.
그런 아버지를 지켜봤던 김종직은 부부의 도를 중시했다. 아내가 김종직의 뜻을 잘 따라 주었던 듯했다. 1482년 김종직의 나이 52세에 아내가 갑자기 죽자, 그는 깊이 탄식했다.
‘옛날에는 그대와 함께 북쪽으로 갔었지
오늘 아침에는 나 홀로 길 떠나네
문을 가득 메운 여종들도 눈물 흘리네
골목을 벗어날 때 느릿한 나귀조차 울었다오
외로운 이 길, 음산한 빗줄기도 시름에 가득하오
유유히 작은 정자에 기대고 섰네
내 몸에 걸친 의복은 모두 옛날 당신이 지은 것
입어보고서 이제야 깨끗한 줄 깨닫는다오.’
‘점필재집 시집’ 제16권
다음 행보가 조금 반전이다. 그는 부인과 사별한 3년 뒤 다시 장가를 들었다. 신부의 나이는 18세, 37세 차이였다. 제자들은 입을 모아 “문씨 여인 역시 부도를 잘 닦아서 집안이 화목했다” “그 안에 아름다운 법도가 있었다”고 칭송했다.
평가가 조금 미심쩍다. 김종직은 아버지의 학문적 권위를 이어받아 2대째 학문적 ‘권력’을 다진 상태였다. 게다가 아버지와 다르게 벼슬길도 탄탄했다. 여기에 스승의 스승이자 부친인 김숙자의 ‘비극’을 잘 알고 있었던 터에 스승의 결혼생활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했다간 ‘동창회’에서 제명당하지 않았을까. 학문의 영역은 물론이고 벼슬 살이에도 치명적인 손해를 보았을 것이었다. 제자들의 평가가 100% 순수했을까, 의구심이 인다.
남명 조식의 시대에 두 ‘추문’이 격돌했다. 경상도 관찰사가 이희안이라는 인물의 후처가 문란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를 조사하려 하자, 조식은 발끈했다. 뭔가 음모가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조식은 이희안의 후처에 관한 소문을 옮긴 이정을 지목했다. 이정의 경우 첩의 오빠 집안에 문제가 있었다. 조식은 그집과 관련된 추문을 제자에게 귀띔했다.
제자들은 조식이 알려준 추문의 주인공과 관련해 실행을 성토하는 통문을 짓고 당시 과부였던 그 여성이 사는 집을 습격했다. - 집을 허물어버렸다. 여기에 이정이 그 여성에게 뇌물을 받고 허물을 숨겨려 했단 혐의도 잡아냈다.
이 사건은 조정에까지 알려졌고 조식을 비판하는 목소리와 변호하는 말들이 뒤섞였다. 후유증도 오래 갔다. 조식의 제자들이 이정의 손자(이곤변)대에까지 비난을 멈추지 않았다. 손자는 억울한 마음에 ‘졸변(拙辨)’이라는 글을 지어 할아버지를 변호했고, 조식의 손자는 여기에 발끈해 ‘반변(反辨)’을 지어 반박했다.
실록은 이와 관련해 “영남의 선비들이 당파를 나누게 된 화근이 이 사건에서 시작되었다”고 평가했다(선조수정실록, 선조 2년 5월1일).
이 모든 것이 스승과 제자가 똘똘 뭉치는 바람에 벌어진 일이었다. 한 개인의 오지랖이었다면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 일이었으나 스승과 제자라는 ‘집단’이 움직이자 세대를 뛰어넘은 사건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사건 자체는 사소하지만 그와 관련된 일들을 결코 사소하지 않았다.
스승과 제자. 언뜻 순수한 것 같으면서도 그 어떤 집단 이상으로 음험해 보인다.
참고>
백승종, <조선, 아내 열전>, 시대의창, 2022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