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이 있는 이야기

베르타 폰 주트너

프로시안 2022. 11. 7. 17:03

베르타 폰 주트너

 

 

 

 

하버드는 왜 그럴까?



베르타 폰 주트너(1843-1914).독일 출신으로 1905년 노벨평화상을 탔다. 여성으로서는 최초의 기록이었다. 유로화가 통용되기 전에 오스트리아의 가장 고액지폐인 1000쉴링에 얼굴이 실렸고, 현재는 2유로 주화에서 그의 얼굴을 볼 수 있다.



이 여성은 대한제국 혹은 조선에 중요한 사건이 벌어질 때마다 목소리를 높였다. 1909년에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했을 때가 특히 그랬다. 그 사건은 유럽을 충격에 빠뜨렸다. 그런데 그 이유가 우리 생각과 사뭇 다르다. 당시 이토 히로부미는 세계적으로 인정을 받는 거의 유일한 아시아 정치인이었다. 이런 뛰어난 정치인을 잃어버린 것에 대해서 충격을 느끼고 애도하는 분위기였다.



영국은 크게 당황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인도를 지배하는데 어려움을 겪는 이유를 서양인이 동양인을 지배하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일본과 조선은 같은 동양인이라서 지배가 쉬울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편견이 ‘조선 청년’의 총탄에 와르르 무너져버린 것이었다.

 



주트너 여사는 이토 히로부미가 암살당한 직후에 발표한 글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한 조선인이 조국을 위해 복수한 것’이라고 정확히 표현하고 일본이 얼마나 굴욕적으로 조선을 탄압했는지 직접 들었다고 썼다.



그 이전에 쓴 논설에서는 대한제국 곳곳에서 항일의병 활동이 일어나고 있고, 폭력에 저항하는 조선인들의 의병활동을 못 본 척 외면하면 폭력에 저항하는 전염볌이 전 세계를 위협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기도 했다. 일본을 그냥 놔두면 안 된다는 것이 요지였다.



이토 히로부미가 사망한 이듬해에 대한제국은 국권을 빼앗겼다. 유럽에서는 이토 히로부미 덕분에 동아시아에서 더 이상 새로운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 이들이 많았고, 그가 죽은 뒤 일어난 소위 ‘한일병합’도 그렇게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주트너 여사는 이런 시각을 가진 이들을 ‘장님’ ‘벙어리’라고 비판하면서 ‘평화를 사랑하는 대한제국은 일본의 노예가 되었고 주권을 무력으로 강탈당했다’고 썼다.



더 놀라운 주장도 있다. 주트너 여사는 대한제국의 상황에 깊은 유감을 느낀다고 밝힌 후에 제국주의 침략의 희생양을 접수할 국제법원과 폭력을 방지할 수 있는 세계 군대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45년에 문을 연 국제사법재판소와 UN이 그 비슷한 역할을 하고 있다. 주트너 여사가 사망한 것이 1914년, 거의 30년 뒤에 일어날 일을 예언한 셈이다.

 

 



주트너 여사가 조선 혹은 대한제국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가 있었다. 1907년 7월 9일, 주트너 여사는 네덜란드를 방문했다가 어느 동양인의 강연을 들었다. 당시 그가 머물던 집에는 세계 평화에 관심이 많은 지식인들과 다양한 국적의 외교관과 정치인이 모여있었다. 이 동양인은 그 자리에서 일본의 야만적인 탄압과 무력 사용, 거기에 맞선 조선인들의 저항을 상세하게 설명했다. 그는 나라의 국채를 갚겠다고 민중들이 일어섰다는 이야기도 전했다(국채보상운동).



그 동양인 강연자의 이름은 이위종이었다. 헤이그 특사 중의 한 명이었다. 공식적인 회의에는 참가하지 못했으나, 밤에 각국의 외교관과 정치인들이 모이는 장소로 가서 열심히 조선의 상황을 알렸다. - 헤이그 특사가 실패했다고만은 할 수 없다. 이렇게 알린 덕분에 세계 최초의 여성 노벨평화상 수상자가 조선의 열렬한 후원자가 되었다.



최근 미국 하버드대학원이 “일본의 지배 덕분에 한국이 발전했다”는 내용과 삼국시대를 축소하고, 고려사를 왜곡하는 식의 서술이 담긴 교재를 사용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100년이 흘렀지만 우리에겐 아직도 바로 알려야 할 역사가 너무 많다.



참고>

고혜련, <우아한 루저의 나라>, 정은문고, 202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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