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예
백인 하인들과 함께 시위에 참가한 흑인 노예들
“직업이 무엇이오?”
“직장인... 아니 노비요.”
어느 예능 프로그램에 등장한 장면이다. 공감 버튼을 많이 받았다. ‘온전한’ 자유를 억압받는다는 점에서, 그리고 ‘갑질’에 완벽한 저항이 힘들다는 면에서 요즘 직장인들이 과거의 ‘대감댁 노비’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은 듯.
미국 흑인 노예의 역사를 보면 다양한 형태의 ‘노비’들이 존재했다. 대개는 흑인만 떠올리지만 인종적으로 보면 황인종, 백인도 노비 신세를 변하지 못했다. 이들의 면면을 간단하게 살펴보면 ‘노예’ 혹은 ‘노비’의 실체를 어느 정도 규명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아메리카 최초의 노예들은 원주민이었다. 영국인들은 스페인인들의 선례를 따라 원주민을 노비로 삼았다. 이 시도는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다. 영국인들은 농장에서 일한 노예를 구했으나 이들은 수렵이나 채집에 익숙한 ‘자유로운 영혼’들이었다. 체질에 맞지 않아 뛰쳐나가는 인디언들이 많았다. ‘인디언 노예’는 결국 실패했다. 그래도 그 숫자가 적지 않았다. 1708년 사우스캐롤라이나 인구 9,580명 중 1,400명이 인디언 노예였다.
인디언 다음으로 포착된 노예 노동은 가난한 자들이었다. 영국에서 땅 없는 농민과 도시 빈민이 주요 노동력으로 흡수됐다. 영국의 도시 곳곳에서 죄수와 부랑자(부랑 자체도 범죄였다)들이 얻어맞고 결박 당해서 배에 태워졌다. 이들은 ‘계약 하인’으로 불렸다. 자유롭게 결혼할 수도 술을 사거나 물건을 팔 수도 없었다. 도망가다 잡히면 채찍을 맞았고 낙인이 찍히거나 다른 집에 팔려가기도 했다. - 거의 인신매매 수준이었다. 다만 노예와는 달리 계약 기간이 끝나면 자유인으로 돌아갔다. 이들에게는 생존에 필요한 물품과 함께 50에이커 가량의 토지를 줬다. 그 숫자가 만만찮았다. 버지니아를 보면 1625년 총인구 1,200명 중에서 500명이, 1670년에는 총인구 4만 명중에서 6,000명이 백인 계약 하인이었다. 당시 버지니아 흑인 노예의 숫자는 2,000명, 억압적 노동 환경에 처한 백인이 흑인보다 3배 정도 더 많았다. 식민지 시대 동안 인구 구성의 10%~20%가 백인 계약 하인이었다.
백인 계약 하인이 서서히 사라진 것은 고용 불안과 비용 때문이었다. 고용 불안이라는 것은 사업주 측의 불안이었다. 언젠가는 나갈 사람과 일 하자니 여간 불안불안하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 흑인 노예가 선호됐다. 최초 ‘구입비’는 비쌌지만 유지 비용이 백인 하인보다 훨씬 적게 들었다. 게다가 노예가 자식을 낳으면 ‘무료’였다.
백인 하인들은 때로 파업도 불사했다. 1663년 폭동이 일어났다. 주동자 중의 한 명이었던 아이작 프렌드(Isaac Friend)란 인물은 ‘자유와 죽음 중 하나에 걸었다’는 말을 남겼다. (이 파업에는 흑인도 다수 참가했다!) 1676년 버지니아에서도 반란이 일어났다. 나다니엘 베이컨(Nathaniel Bacon)이 일으킨 이 반란에 참가한 사람은 대부분 백인 계약 하인들이었다. 이런 경험을 통해 농장주와 사업주들은 다소 통제가 수월한 흑인 노예들을 선호하게 되었다. 일종의 풍선효과였고, 가장 약한 계층이 그 무거운 노동의 짐을 떠안게 된 것이었다.
저항할 수 없다면 당신은 노예다. 저항할 수단과 방법, 힘이 있다면, 상황을 개선시킬 희망이 있다면 당신은 적어도 노예는 아니다.
참고>
혼다 소조, <미국 흑인의 역사>, 김효진 옮김, AK, 2022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