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이 있는 이야기

아내

프로시안 2022. 11. 8. 20:58

아내

 

 

 

 

 

무산에 산다는 그녀



‘아내는 옷에 묻은 술 자국이 많다며 화를 내셨네.’



목은 이색(1328-1396)이 어느 해 겨울 남긴 기록이다. 과음했다지만 핑계는 있었다. 이름난 재상들과 높은 관리들과 무리를 이루어 공민왕의 무덤인 현릉을 참배했다. 돌아오는 길에 여러 차례 술자리가 있었고 주거니 권하거니 ‘사회 생활’을 하느라 취하도록 마시지 않을 수 없었다. 아내는 이런 남편에게 화를 냈다. 결코 만만치 않은 지위에 명분도 있었지만 ‘무서운 아내’의 지청구는 피할 수 없었다.

 



이중민이라는 인물이 있었다. 그는 아내의 치마를 바느질해서 꿰맸다. 이 일이 어쩌다 친구의 귀에 들어갔다. 그의 친구 이규보는 멋들어진 시를 지었다. (시는 ‘동국이상국집’ 5권에 남았다.)



‘눈빛처럼 곱네 하얀 비단 치마 밟아서 찢어지고 말았네

뉘 집 휘장 아래서 탁문군을 희롱하였더란 말인가.

부인이시여 이제 바느질일랑 그만두세요

앞으로는 무산에서 운우의 꿈에 젖으시길 바랍니다.’

 



탁문군은 한나라의 미인이었다. 이중민의 아내를 탁문군에 비유한 것이었다. 마지막 줄에 등장하는 무산은 초나라 희왕의 고사에서 따왔다. 희왕이 낮잠을 자다 꿈속에서 미인을 만나 무산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부인은 떠나면서 “나의 집은 무산에 있는데, 아침이면 구름이 되고 저녁이면 비가 되어 내립니다.”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이중민은 신혼이었을 것이다. 적나라한 농담이었다.



조선과 비교해 고려는 부부 사이에 허물이 없어 보인다. 서로 아끼는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는 면에서는 조선보다는 지금에 가까운 정서인 듯하다.



참고>

백승종, <조선, 아내 열전>, 시대의창, 202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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