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술
그들은 모든 것을 아는 것처럼 보일 뿐
문자는 인류에게 너무도 익숙한 것이지만 이전 시대는 그렇지 못했다. 인쇄술이 발달하고 나서도 문자는 한동안 명백한 기억보다 불편하게 여겨졌고, 그 이전은 말할 것도 없었다. 저물어가는 ‘기억(기억술)의 시대’에 대한 쓸쓸한 독백이 있었다. 빅토르 위고가 쓴 ‘노트르담의 곱추’(1831)에 나오는 내용이다. 한 학자가 인쇄된 책을 집어들고 성당을 바라보며 중얼거린다.
“새로운 것이 옛것을 사라지게 할 것이다.”
새로운 것은 기억을 담은 책이었고 옛것은 기억술이었다. 고대로부터 이어진 기억술은 성당 같은 ‘공간’과 깊은 연관이 있었다. 기억술은 그리스의 서정시인 시모니데스(BC 550-468)였다. 키케로는 그의 기억술을 이렇게 설명했다.
‘그는 이 능력을 키우려는 사람은 장소를 선택하여 기억하고 싶은 사물의 영상을 머릿속에 그려 넣고, 그 영상을 선택 장소에 각각 저장해야 한다고 추론했다. 그렇게 해서 장소의 순서가 사물의 순서를 간직하고 사물의 영상은 사물 자체를 나타낼 것이며, 우리는 이 장소와 영상을 각각 밀랍 서판과 그 위에 쓰인 문자에 활용할 것이다.’
그의 ‘기억술’은 인류가 오랫동안 간직하고 발전시키는 핵심 기술 중의 하나가 됐다. 16세기초 라벤나의 피터(Peter of Ravenna)는 젊은 시절 10만 개 이상의 ‘기억 저장소’를 마음에 새겨두었다. 대부분 버려진 교회 건물이었다. 그는 교회법과 키케로가 행한 200개의 연설, 그리고 2만 개의 법 조항을 암기했다.
쿠텐베르크가 인쇄의 시대를 열기 전까지 기억술은 인류를 지배했다. 전조는 있었다. 기억술에 대한 최초의 저항은 문자였다. 소크라테스는 글쓰기가 인류에게 심각한 폐해를 줄 것이라고 내다봤다. 플라톤이 기록한 소크라테스와 파이드루스의 대화에는 문자를 발명한 이집트의 신 토트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한다. 이집트의 왕 타무스는 토트를 이렇게 비난했다.
‘그대의 이 발명은 배우는 자들의 영혼에 망각을 만들어 낼 것이다. 그들은 기억을 사용하지 않을 테고, 무엇인가를 기억하는 내적인 능력 대신 외부로 나타난 문자에만 의존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대가 발명한 특이한 것은 기억이 아닌 회상의 수단이다. 그리고 그대는 제자들에게 진리가 아닌 진리와 비슷한 허울만을 제공했다. 그들은 많은 것을 들을 뿐, 아무것도 배우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모든 것을 아는 것처럼 보일 뿐 실제로는 아무것도 모를 것이다. 다시 말해, 진실이 아닌 지혜롭다는 자만심을 내세우는 골치 아픈 동료가 될 것이다.’
쿠텐베르크라는 ‘악마’가 등장하기 전까지만 해도 기억술은 위세를 잃지 않았다. 소크라테스의 우려는 2000년간 그럭저럭 봉인할 수 있었다. 영국의 법학자였던 윌리엄 블랙스톤 경은 1765년 이런 기록을 남겼다.
“이전에는 유럽 전체에서 일반적으로 문자를 매우 무시했으며, 이런 명백한 이유로 문자가 널리 퍼진 나라들도 이전의 전통에 따르며 기록한다는 생각을 거의 하지 않았다. 따라서 갈리아의 드루이드교 성직자들과 마찬가지로 영국 사람들도 지식과 함께 모든 법을 기억에 맡겼다.”
대량 인쇄가 늘어나면서 기억술은 점점 설 자리를 잃었다. 기억이라는 단어는 실어증, 건망증, 히스테리, 최면 같은 정신분석에 자리를 내줬다. 프로이드는 기억이라는 단어에 ‘무의식’이라는 단어로 대체하다시피 했다.
지금은 인쇄 혁명에서 몇 단계를 더 나아갔다. 바로 인터넷을 통해 정보 홍수다. 책을 읽지 않아도 입에 올릴 수 있는 ‘지식’이 너무 많아졌다.
인쇄 혁명기 이전, 기억술의 시대에서도 나름의 장점이 있었듯 인터넷의 시대에도 책의 장점은 있다. 오히려 대체 불가한 덕목이 존재한다. 이를테면 목차와 페이지를 달고 긴 양의 지식을 일목요연하고 논리적으로 독자에게 제시하는 방식이다. 지식을 다루는 법에 있어서 책은 지식이 존재하는 한 영원히 빛날 형식을 구축해놓았다.
경멸해야 할 것은 문자와 인쇄물이 아니라 오히려 무게 없이 떠다니는 가벼운 정보들 혹은 가볍게 취급되는 낱낱의 진리들일 런지도 모른다.
“그들은 모든 것을 아는 것처럼 보일 뿐 실제로는 아무것도 모를 것이다. 다시 말해, 진실이 아닌 지혜롭다는 자만심을 내세우는 골치 아픈 동료가 될 것이다.” - 플라톤, <파이드루스>
참고>
대니얼 J. 부어스틴, <발견자들>, 이경희 옮김, EBS BOOKS, 2022년00
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