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역사
한국은 왜 모였다 하면 절반이 ‘김이박’일까?
한국 사람 100명이 모이면 그중 45명은 김씨, 이씨, 박씨다. 우리나라 250개 성씨 중 김씨는 21%, 이씨는 15%, 박씨는 9%다. 그 뒤로 최씨(5%), 정씨(5%)가 이어진다.
우리에겐 익숙하지만 정말 특이한 비율이다. 일본만 해도 가장 흔한 사토의 비중이 1.57%에 그친다. 2위 스즈키는 1.5%다. 미국에서 가장 흔한 성씨는 스미스. 그런데 그 비중이 0.8%에 그친다. 제일 많은 스미스, 존슨, 윌리엄스를 합쳐도 2%에 못 미친다.
조금 더 살펴보자면 스페인은 가르시아씨가 전체에서 3.5%를 차지, 인도는 싱(singh)이 2.7%, 독일은 뮬러가 0.8%, 프랑스는 마틴이 0.5%, 이란은 모함마디가 1%, 사우디아라비아는 칸이 1.5%, 이탈리아는 로시가 0.5% 등이다.
중국과 웨일스 베트남은 조금 다르다. 중국은 왕이 7%, 리와 장 역시 7%, 다 합치면 21%다. 웨일스에서는 존스의 비율이 6%에 가깝다.
베트남은 파격적으로 인구의 38%가 응우옌이다. 이는 조금 특이한 사연이 있는데, 베트남의 마지막 왕조 응우예 왕조가 자신을 지지하는 이들에게 응우옌이라는 성을 하사했다. 성을 받은 이들은 보복이 두려워, 혹은 귀찮아서 받은 성을 그대로 썼다. 그래서 압도적인 비율로 응우옌씨가 베트남을 장악하게 된 것이었다.
베트남을 제외하면 3개 성씨가 45%에 해당하는 비율을 차지한 이유가 뭘까. 일본의 경우를 보면 쉽게 납득이 간다. 하버드에서 한국학으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고 브리검영대학에서 30년 이상 한국사를 강의한 마크 피터슨은 자신이 이 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를 이렇게 밝혔다.
‘몇 년 전 일본에서 온 학생을 만난 적이 있다. 그녀는 자신의 성이 후지와라라고 밝혔다. 후지와라는 헤이안 시대 일본의 권력을 장악했던 가문의 성이었다. 그 사실을 말하자 그녀는 이렇게 설명했다. “네, 맞아요. 하지만 우리 가문 중 지금까지 남아 있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아요. 헤이안 시대 이후 가문 전체가 몰살을 당했으니까요.”’
일본 유럽 혹은 그 어느 나라도 왕조가 몰락하면 대학살의 혼란이 찾아온다. 몰락한 왕조의 가문은 대부분 살아남지 못한다.
한국의 김 이 박 등 주성은 아주 오래된 성들이다. 이들의 후손이 이토록 번창했다는 것은 그만큼 정치가 안정되었고 왕조의 교체기에도 대학살이 벌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테면 김유신은 가야 왕의 손자였지만, 그를 비롯해 그의 일족은 몰살당하지 않았다. 신라의 귀족에 흡수되었다. 그의 후손들은 신라의 김씨들과 동맹을 맺고 후백제와 싸우기도 했다.
신라 출신의 김, 박, 이, 최, 정씨는 고려 귀족이 되기도 했다. 고려가 망하고 들어선 이씨 역시 신라 육부촌 중 하나인 이씨 가문이었다. 서라벌 후손이 조선을 건국한 셈이다.
예외적인 사건으로 알려진 ‘학살’이 하나 있긴 하다. 바로 조선이 개국하면서 벌어진 왕씨들에 대한 탄압이다. 실제로 왕씨 성을 가진 사람은 현재 그리 많지 않다.
이에 대한 대답은 일부는 죽었겠지만 일족이 몰상당하지는 않았다는 것이었다. 첫 번째로 살펴볼 것은 조선의 개국 공신 명단이다. 여기에 왕씨가 두 명이나 포함되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왕씨 자체가 많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고려 시대 과거 (문과) 합격자 1,500명 중 왕씨는 13명뿐이었다. 조선 시대 전주 이씨의 합격 비율(6%)이 전체 응시 성씨 중 가장 높았다는 점을 감안하면 왕씨 역시 응시자 중 강세를 보였을 테지만 합격자 수는 저 정도밖에 배출하지 못했다.
현재 왕씨는 희귀성이 아니다. 북한을 제외하고 한국에서만 세어봐도 왕씨가 2만5,000명에 이른다.
한국 역사에서도 왕실 가문과 귀족 가문이 전멸된 사례가 존재하기는 한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기 이전이었다.) 백제와 고구려에서 일어나는 현상이었다. 백제 시대 귀족인 사씨, 연씨, 협씨, 해씨, 정씨, 국씨, 목씨, 백씨 등 8대 귀족 가문은 백제 후기 역사에서 이름이 사라졌다. 고구려 역시 멸망과 함께 대부분의 귀족 가문이 사라졌다. 고씨와 태씨만 남았다.
일본은 한국의 이러한 역사를 거꾸로 봤다. 그들은 왕조의 잦은 교체를 ‘혁명’이라고 봤다. 혁명은 곧 발전이었고 일본은 이 발전적 사건이 잦았다. 이런 잣대를 가지고 세계 역사를 통틀어 봐도 왕조의 생명이 길었던 한국사를 폄훼했다. 왕조의 수가 적다는 것은 진보에서 뒤처졌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와 대조시켜 일본의 역사를 상당히 역동적이라고 해석했는데, 왕조 교체와 대혼란 그에 따른 대학살도 긍정적으로 본 것이다. 그들은 혼란과 격변, 피의 사건을 명예스러운 역사로 받아들였다.
한국은 사뭇 달랐다. 왕조의 교체가 무척 평화로웠다. 사회가 발칵 뒤집어지는 사건도 아니었다. 수천 명의 목이 달아나는 살육도 기존 지배계급이 전멸하는 현상도 나타나지 않았다. ‘사무라이’ 일본과는 사뭇 다른 학자의 나라였기에 가능한 일이었지만 이들은 이를 온전히 이해할 생각이 없었다. 한국을 후진적인 국가로 낙인찍고 일본을 치켜세울 생각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요컨대, 한국은 후진적이지 않았고, 역사의 진화에서 일본에 앞서는 나라였다.
참고>
마크 피터슨 신채용, <우물 밖의 개구리가 보는 한국사>, 지식의숲, 2023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