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이 있는 이야기

스티브잡스

프로시안 2022. 7. 31. 18:12

스티브잡스

 

 

 

 

너는 누구냐?
  
  
  “당신은 프로그램 개발 못해. 엔지니어가 아니잖소. 하는 일이 정확히 뭐요.”
  “자넨... 독재자야.”
  “스티브 잡스 자네와 시각이 똑같은 사람은 없어.”
  “차고 안에서 미래를 창조했다”고 허풍치는 남자의 전기 영화 예고편에 나오는 대사다. 
  
  아무도 그를 몰랐다. 그가 무엇을 했는지, 혹은 무엇이라고 불러야 하는지. 우리는 아직도 그를 부를 때 아무런 수식 없이 이름만 부른다. ‘스티브 잡스.’
  
  낯설지만 익숙한 풍경이다. 세계의 시스템이 바뀔 때, 혹은 인생이 감지하기 힘들 만큼 큰 변화가 찾아올 때 ‘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기존의 시스템에서는 규정하기 힘들기 때문에 저런 질문을 던지고 또 저항하거나 굴종한다. 
  

 

 


  세계는 (앨빈 토플러에 따르면) 크게 수렵과 채집에서 농경 사회로 진입해 산업화를 이루었고 다시 지식사회로 접어들었다. 변화의 고비마다 타인보다 먼저 앞선 세계로 나가는 인물이 탄생하기 마련이었고, 그런 인물들 앞에서 세상은 당황했다.
  

 

 


  이를테면 수렵과 유목에 익숙한 이들은 농경을 낯설어했다. 칭기스칸은 “너희가 만약에 땅에 씨를 뿌리고 산다면 이는 종족의 끝 날이 될 것”이라는 말로 농경 문화를 경멸했다. -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유럽에서 배를 타고 원거리 무역에 나서는 이들도 반쯤 ‘도적떼’로 인식하는 경향도 있었다. 지금과는 사뭇 다른 판단이었다. 
  
  몇몇 개인들도 이런 취급을 받았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살아 있을 때 ‘수공업자’로 분류돼 주방장, 집사와 같은 테이블에 앉아 식사를 했다. 이 외에도 죽고 난 뒤에야 대접받는 예술가가 선구자는 얼마든지 있다. 인류는 그들에게 먼저 찾아온 미래, 혹은 그런 분위기가 감지되는 사람들에 대해 열광하면서도 낯설어 했다. 
  

 

 


  스티브 잡스의 존재는 우리가 채집에서 농경으로, 농경에서 공업으로 옮겨가던 때만큼이나 큰 변화의 시기를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그는 확실히 우리보다 더 먼 미래를 살다가 ‘과거’에 죽었다. 우리도 언젠가는 그리로 가야 한다. 그것이 무엇인지, 어떤 모습일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삶의 패턴을 완전히 바꿀 변화인 것만큼 확실해 보인다. 그 변화에 대한 설렘과 두려움이 ‘스티브 잡스’라는 괴팍한 개척자의 삶을 끊임없이 파고들게 만드는 원동력일 것이다.
  
참고>
에릭 R. 울프, 박광식 옮김, <유럽과 역사 없는 사람들>, 뿌리와이파리, 2010
슈테판 클라인, 유영미 옮김, <다빈치의 인문공부>, 웅진지식하우스, 2009

 

 

 

 

너는 누구냐?
  
  
  “당신은 프로그램 개발 못해. 엔지니어가 아니잖소. 하는 일이 정확히 뭐요.”
  “자넨... 독재자야.”
  “스티브 잡스 자네와 시각이 똑같은 사람은 없어.”
  “차고 안에서 미래를 창조했다”고 허풍치는 남자의 전기 영화 예고편에 나오는 대사다. 
  
  아무도 그를 몰랐다. 그가 무엇을 했는지, 혹은 무엇이라고 불러야 하는지. 우리는 아직도 그를 부를 때 아무런 수식 없이 이름만 부른다. ‘스티브 잡스.’
  
  낯설지만 익숙한 풍경이다. 세계의 시스템이 바뀔 때, 혹은 인생이 감지하기 힘들 만큼 큰 변화가 찾아올 때 ‘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기존의 시스템에서는 규정하기 힘들기 때문에 저런 질문을 던지고 또 저항하거나 굴종한다. 
  
  세계는 (앨빈 토플러에 따르면) 크게 수렵과 채집에서 농경 사회로 진입해 산업화를 이루었고 다시 지식사회로 접어들었다. 변화의 고비마다 타인보다 먼저 앞선 세계로 나가는 인물이 탄생하기 마련이었고, 그런 인물들 앞에서 세상은 당황했다.
  
  이를테면 수렵과 유목에 익숙한 이들은 농경을 낯설어했다. 칭기스칸은 “너희가 만약에 땅에 씨를 뿌리고 산다면 이는 종족의 끝 날이 될 것”이라는 말로 농경 문화를 경멸했다. -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유럽에서 배를 타고 원거리 무역에 나서는 이들도 반쯤 ‘도적떼’로 인식하는 경향도 있었다. 지금과는 사뭇 다른 판단이었다. 
  
  몇몇 개인들도 이런 취급을 받았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살아 있을 때 ‘수공업자’로 분류돼 주방장, 집사와 같은 테이블에 앉아 식사를 했다. 이 외에도 죽고 난 뒤에야 대접받는 예술가가 선구자는 얼마든지 있다. 인류는 그들에게 먼저 찾아온 미래, 혹은 그런 분위기가 감지되는 사람들에 대해 열광하면서도 낯설어 했다. 
  
  스티브 잡스의 존재는 우리가 채집에서 농경으로, 농경에서 공업으로 옮겨가던 때만큼이나 큰 변화의 시기를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그는 확실히 우리보다 더 먼 미래를 살다가 ‘과거’에 죽었다. 우리도 언젠가는 그리로 가야 한다. 그것이 무엇인지, 어떤 모습일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삶의 패턴을 완전히 바꿀 변화인 것만큼 확실해 보인다. 그 변화에 대한 설렘과 두려움이 ‘스티브 잡스’라는 괴팍한 개척자의 삶을 끊임없이 파고들게 만드는 원동력일 것이다.
  
참고>
에릭 R. 울프, 박광식 옮김, <유럽과 역사 없는 사람들>, 뿌리와이파리, 2010
슈테판 클라인, 유영미 옮김, <다빈치의 인문공부>, 웅진지식하우스,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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