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문수
박문수가 ‘뜬’ 이유
얼마 전 정치인들이 택시를 타고 시민들을 만나는 장면이 전파를 탔다. (카메라 없을 때라도 꾸준히 시민을 만나면 좋을 것이다.) 아무리 미디어 시대라고 하더라도 시민들에게 직접 목소리를 듣는 노력은 반드시 필요하다. 미디어와 SNS가 활발하다고는 해도 입맛대로 거르고 ‘조작’하려는 시도가 있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민심을 보는 훌륭한 ‘창’은 못 되는 것이다.
조선에도 여론을 정제 과정 없이 발굴하려는 제도가 있었다. 암행어사 제도였다. 암행어사는 출두하기 전까지는 그저 평범한 백성의 신분이었다. 때로 포졸의 위협에도 ‘어이쿠!’하면서 자리를 피해야 했다. “아니, 이놈이!” 하면서 신분을 밝혔다간 임무를 실패할 것이었으니까.
암행어사 하면 대개 박문수를 떠올린다. 그는 37세 되던 해인 1727년(영조3)9월 25일 천거가 이루어졌다. 그해 10월, 어사로 활동한다. 박문수가 암행어사의 대명사가 된 것은 이 시기의 행적 때문이었다. 그는 이 암행 후 구휼과 탐관오리 징계, 수령이 가족을 거느리고 지방에 내려가면서 일어나는 폐단을 지적했고, 피폐한 지방에는 문과, 무관, 음관을 가리지 말고 부임시킬 것을 건의했다. 그는 이후에도 자원해서 지방을 둘러보고 오곤 했다.
또한 문제점으로 파악한 것들은 ‘선배’들과 마찰을 빚으면서까지 반드시 해결하려고 노력했다. 그의 상소로 자인(慈仁) 현감, 대구 판관, 울산 부사, 용인 현감 등이 모조리 파직되기도 했다. 이런 노력이 백성들의 마음과 통했을 것이다. 백성들은 탐관오리를 징계하는 암행어사의 영웅적 이미지를 박문수를 통해 각인시켰다.
얼마 후 더 극적인 사건이 벌어졌다. 이듬해 무신란(戊申亂)이 일어났다. 박문수는 토벌군으로 전장에 뛰어들었다. 그는 오명항이 이끌던 대군이 추풍령을 넘을 때 죽을 각오로 별동부대 100인을 거느리고 앞서 나아갔다. 그의 용감한 작전으로 대군은 추풍령을 넘었다.
후일 박문수는 오명항이 전라도로 떠난 뒤, 경상도에 남아서 백성들을 위로하고 본업에 복귀하도록 조치했다. 조정에서는 파격적으로 박문수를 현지에서 관찰사로 임명했다.(전라도는 감진어사로 가 있던 이광덕이 관찰사를 맡았다).
그는 관찰사로서 전권을 부여받자 지방의 다양한 폐단을 고쳐나갔다. 암행하던 시절 파악했던 부조리를 해결해 나갔던 것이다. 그 결과 백성들은 그를 ‘영원한 암행어사’로 기억하기 시작했다. 그의 이야기 속에서는 암행어사로서가 아니라 관찰사로서 행했던 치적까지 모두 포함되었다.
어찌 보면 행운이었다. 평시였다면 그렇게 갑작스럽게 관찰사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 그것도 재량권을 최대치로 허용받는. 하지만 발로 뛰면서 발굴한 민심에 대한 정보가 없었다면 두고두고 기억되는 훌륭한 정치를 베풀지는 못했을 것이다. 요컨대, 민심을 아는 것이 선정의 바탕이 되었던 것이다. 오늘날도 다르지 않다. 신문과 SNS로는 부족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