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익점
민생
‘민생은 뒷전’.
정치와 관련해 가장 흔히 등장하는 문구다. 언론에서 묘사하는 것만큼 그렇게 관심이 없는지는 몰라도 가끔 너무 정치적 논리에만 신경을 쏟는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우리나라에 목화씨를 들여온 문익점(文益漸, 1329~1398)도 정치적으로 곤란한 상황에 처한 적이 있었다. 그가 원나라에 서장관으로 사신단 일행을 따라나섰을 때였다. 그 시기 원나라는 중대한 사건 하나를 일으킬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공민왕을 몰아내고 충선왕의 셋째 아들은 덕흥군을 고려왕으로 세우려는 거였다. (덕흥군은 당시 원에 있었다.)
원은 덕흥군에게 군사 1만을 책정하는가 하면, 사신단들도 도무 덕흥군에게 줄을 서도록 했다. 사신들로서는 난감했다. 차라리 몰랐으면 모르되 안 이상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상황이었다. 문익점도 어쩔 수 없이 그들이 원하는 ‘줄’에 섰다.
국력이 기우는 원나라, 원나라부터 벗어나려는 고려, 이 틈바구니에서 얼마나 머릿속에 복잡했을까.
바로 그 시기 ‘뜻밖의’ 사건이 벌어졌다. 아니 문익점이 벌였다고 해야 한다. 그 정신없는 와중에 목화씨를 들여온 것이었다. 그것도 ‘한 번 가져가 볼까’가 아니었다.
그는 가져온 씨앗을 애지중지 키웠다. 장인과 나누어 뿌렸는데, 겨우 씨앗 하나가 싹을 틔웠다. 이 목화를 키워 많은 씨앗을 얻어냈다.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목화를 키웠으면 실을 뽑아내야 할 것이었다. 여기에는 운이 따랐다. 마침 고려로 여행 온 중국 출신의 승려가 목화에서 실을 뽑는 법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그에게 실 만드는 법까지 배웠다. 말 그대로 열정적인 일처리였다. - 정치적으로는 머리가 러시아워처럼 복잡했을 시기에.
정신없는 시기가 지나자 사람들은 문익점을 다시 떠올렸다. ‘정치’와 상관 없는 ‘민생’에 대한 공로 덕분이었다. 태종 때, 권근이 문익점의 자식에게 벼슬을 내려야 한다고 청했다. 그 청은 받아들여졌다.
조선후기까지 그를 기리는 마음이 있었던 듯하다. 이덕무는 <청장관전서>에 재밌는 이야기를 실었다. 목화와 관련해 물레와 무명이란 명칭이 각각 문익점의 아들과 손자의 이름을 따서 만든 것이라는 설이었다. 문익점의 아들은 문래, 손자는 문영이라는 게 그 근거였다. 사실일 가능성은 없지만 조선 후기까지 사람들이 그의 공로를 얼마나 고맙게 여겼는지 알 수 있는 이야기다. 백성들은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찬바람 불 때 얇은 베옷 입고 고생 안 하고 솜옷 입을 수 있는 건 모두 그 문익점 어른 덕분이야!”
정치적으로 혼란스럽기 짝이 없는 시기 ‘민생’을 챙긴 그의 공로는 조선 왕조 내내 칭송을 받았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