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건
대감집 여종 “내가 먼저 사랑했어요”
돌금. 여종의 이름이다. 16세기 사람이었던 이문건(1494-1567)의 집에서 일했던 여자 종이었다. 이문건 일가는 경북 성주에 유배와 있었다. 돌금은 이문건이 쓴 일기에 1546년부터 1563년까지 17년 동안 간간이 이름이 등장한다.
돌금은 충청도 보은에 있는 여비 삼월의 딸이었다. 돌금은 남동생이 셋 있었다. 서울에서 살 때 혼인을 했고, 2년 후 남편과 함께 강전이 유배를 살고 있는 성주로 이주했다.
돌금은 한 성격하는 여자였던 듯하다. 그는 상전의 며느리를 우습게 보았다.
“돌금이 며느리를 업신여겨 말을 거역하고 혹은 하지도 않은 말을 했다고 거짓으로 꾸민다. 너무 화가 나 천택을 시켜 등 30대를 때리게 했다.”(1553년 9월 18일)
“돌금이 매번 며느리에게 화를 낸다기에 불러 꾸짖고 다른 비(婢)를 시켜 입가를 잡아당기고 귀밑털을 흔들고 머리채를 잡아끌고 다니게 했는데 오만함을 징계하기 위해서다.”(1554년 3월6일)
매질에도 불구하고 돌금은 습관을 바꾸지 않았다. 그럴 만도 했다. 돌금은 그 집 며느리를 압도하는 능력과 지능을 소유하고 있었다. 또 하나는 가족의 연대라는 든든한 뒷배경이 있었다. 두 남동생이 성주, 괴산, 보은을 오가면서 가족 간의 소식을 실어 날랐다.
나름의 업적도 있었다. 1555년 1월4일, 이문건의 며느리 김종금(1526-?)이 출산의 고통에 시달리고 있었다. 태아의 턱이 산문(産門)에 걸려 매달렸다. 아기의 몸이 새파랗게 변하기 시작했고, 돌금이 아기의 턱을 빼서 산문을 통과시켰다. 그때서야 아기가 울음을 터뜨렸다. (이 아이의 이름은 이숙녀, 홋날 정경부인이 된다.)
돌금을 도드라지게 만든 건 이성과 관련된 도발적인 면모였다. 그는 남편과 사별한 지 10년이 흘렀을 때 남자를 만났다. 남자의 이름은 종년이었다. 그도 홀아비였다. 그는 돌금을 만나기 일곱 달 전에 아내를 잃었다. 두 사람은 어떻게 맺어진 것일까. 이문건은 이렇게 기록했다.
“돌금이 종년을 간했다.”
“비(婢)가 종년에게 혹해 떠나질 않는다.”
이문건은 종년을 집에서 쫓아냈다. 이문건의 아내 김돈이는 종년을 불러 면전에서 꾸짖었다. 돌금은 부끄러워하는 듯 했으나 쫓겨났던 며칠 후 쫓겨났던 종년이 다시 돌아오자 기쁜 얼굴을 감추지 않았다. 종이었으나 나름 자신만의 감성과 자기주도적 삶을 놓치 않았던 조선의 걸 크러시 아닐까.
-. 컬 크러시: 여성이 동성(同姓)에게 느끼는, 성적인 감정이 수반되지 않은 강한 호감.
참고>
이숙인, <또 하나의 조선>, 한겨레출판, 2022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