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오카 사건
하나오카 이야기
‘하나오카’. 훗카이도에서 남쪽으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아키타현에 속한 지역으로, 광산이 있었다. 광산은 태평양 전쟁이 말기로 치달으면서 훨씬 더 바빠졌다.
거기에는 세 부류의 노동자들이 있었다. 일본의 하급 노동자들, 징용 당해 온 조선인들, 그리고 중국군을 비롯한 포로들.
징용자 중 한명이었던 김일수 씨는 후일 (경상도에서) 일본으로 끌려올 때를 생생하게 기억했다. 일본군은 군용 차량을 마을 어귀에 세운 뒤 남자가 있는 집이면 마구 들어가 끌어냈다. 순순히 따르지 않으면 소리를 지르면서 수갑을 채웠다. 그래도 반항하면 총을 들이댔다.
“우리 집에 쳐들어 온 건 새벽 2시경... 어머니가 울며 부탁하는데도 강제로 연행되었어요.”
그들은 수직 갱도로 내려가 작업을 했다. 노동자들은 광차 수직갱도와 인도 수직갱도를 같이 파자고 했지만, 회사는 하나만 팠다. 탈출구 없는 갱도에 사고가 났고, 결국 22명이 희생됐다. 일본인 11명, 조선인 11명. 이후에도 회사는 을러대기만 할뿐 반성이나 개선은 없었다.
“증산! 증산!”
그들의 입에서 나온 말은 이것이 전부였다. 당시 이 광산에 끌려온 조선인 노동자는 3천 명이었다. 내일을 장담할 수 없는 삶을 버티어갔다.
포로들도 고통스러웠다. 중국인들은 대개 수로 공사에 동원됐다. 그들은 한겨울에 넝마 한 장을 입고 멍석을 덮고, 다리에는 누더기 짚을 두른 복장으로 종아리까지 차오르는 물에 들어가 일했다. 식사는 만두 하나. 그들은 늘 배가 고팠다.
1945년 6월 30일. 중국군 포로들이 봉기했다. 가장 큰 원인은 허기였다.
다음 날 새벽, 하나오카 분지를 헌병, 경찰, 민경이 둘러쌌다. 포로들은 트럭에 실려 광장으로 끌려왔다. 3일 동안 잠도 자지 못하고, 물도 마시지 못한 채 구타와 고문에 시달리다가 죽어갔다.
“아, 불쌍하다!”
그들의 모습에 이런 탄식을 쏟아서는 안 됐다. 경찰이 즉시 다가와 이렇게 외치면서 끌고 갔다.
“비국민이다. 따라와!”
그들이 생각하는 국민의 범주가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인간적인 어떤 감정도 허락하지 않았다. 인간이 인간에 대해 느끼는 측은지심이 ‘비국민’의 요소였으니. 짐승의 시간이었다.
전쟁이 끝난 후에는 어떻게 되었을까. 가해자들은 모두 벌을 받았을까?
새파래진 자본가 지주 놈들
미국 나리에게 울며 매달렸지
가시마구미의 책임자, 헌병대장
지사, 경찰부장, 특고과장
재향군인회, 익찬청년단 간부
어느 쪽도 뒤지지 않는 피투성이의 살인자들
하지만 웬일일까
하수인이던 작은 전범만 처벌받고
큰 전범들은 또 크게 돈을 벌다니
지금 하나오카는 남의 나라의 군사기지
새로운 전쟁준비를 그들은
도모하고 있다오
우리 노동자 농민을
노예로 부리고 육탄으로 삼으려고
- 세배 요시오, <하나오카 이야기> 중에서
아무것도 정리되지 않은 채, 누구도 책임질 일을 책임지지 않은 채 그 모든 비극이 과거로 치부되어 버렸다. ‘지나간 일’. 지금도 ‘지나간 일’이다.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짐승의 시간, 언제고 다시금 무책임하게 튀어나올지 모르는 ‘짐승의 얼굴’들이다.
며칠 전(8월30일) 우익 총리를 반대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300개 이상의 장소에서 12만 명이 운집했다고 한다. 과거에 대한 인식은 아직 많이 미흡하지만, 다시 짐승의 시간으로 돌아가기 싫은 그들의 심정은 충분히 이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