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적 우월감
양반이 뭐길래
며느리가 돌아왔다. 전쟁 통에 청나라로 끌려갔다가 겨우 살아돌아왔다. 시아버지는 임금에게 “아들 부부의 이혼을 허락해달라.”는 글을 올렸다. 시아버지의 이름은 장유(1587-1638), 왕의 사돈이자 봉림대군의 장인이었다.
‘외아들 장선징이 있는데 강도(江都)의 변에 그의 처가 잡혀갔다가 속환되어 와 지금은 친정 부모 집에 가 있습니다. 그대로 배필로 삼아 함께 선조의 제사를 받들 수 없으니 이혼하고 새로 장가들도록 허락해주소서.’ - 인조 16년 3월 11일
한 사람쯤이야 ‘그렇게 하세요’ 하면 그만이었으나 숫자가 너무 많았다. 임금은 신하들에게 의견을 물었다. 신하들의 여론은 현실론과 이상론으로 나뉘었다.
좌의정 최명길은 반대했다. 첫째는 이혼을 금하는 것이 국법이라고 못 박았다. 임진왜란 이후에도 돌아온 여자들이 있었으나 이들에게 절개를 지킬 의무를 묻지 않았다. 둘째는 급박한 상황에서 몸이 더럽혀졌다는 누명을 뒤집어쓴 경우도 많다고 변호했다. 이들 모두가 몸을 더럽혔다고 할 수 없다. 사실 ‘누명’ 운운했지만 목숨이 위급한 상황에서 정조는 중요하지 않다고 판단했을 것이었다. 게다가 속환이 늦어지면서 자결하는 여인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한 사람은 소원을 이루고 백 집에서 원망을 품는다면 어찌 화기가 상하지 않겠습니까?”
최명길의 발언은 곧 숱한 공격에 직면했다. 명분을 중요시한 이상주의자들은 최명길을 강력하게 공격했다. 그는 ‘나라를 오랑캐로 만든 사람’이라고 비난했다. 그들은 정조에 연연했다.
‘부녀들이 사로잡혀 절개를 잃지 않았다고 어찌 장담하겠는가. 이미 절개를 잃었으면 남편의 집과는 의리가 이미 끊어진 것이니 억지로 다시 합하게 해서 사대부의 가풍을 더럽힐 수는 절대로 없는 것이다.’ - 인조 16년 3월 11일
장원징은 아버지 장유의 소원대로 결국 아내를 떠나보냈다. 절개와 정조에 연연하는 이들의 목소리는 10여년 후에 다시 불쑥 터져 나왔다. 당대의 학자였던 송시열을 통해서였다. 그는 장유의 손자 장훤을 지목했다. 장훤은 장선징의 아들로 이혼당한 아내 한씨가 낳은 자식이었다. 그는 할아버지의 뜻에 따라 어머니와 생이별을 했었다.
‘정축년 변란 초에 실절한 부인을 버리지 못하게 하였으니 이는 실절을 가르친 것입니다. 법을 의롭게 제정해도 악용될까 걱정인데 이런 식으로 법을 만드니 어찌 백성을 단속할 수 있겠습니까. 듣건대 장선징의 집에 실절한 부인의 소생이 있는데 상신이 그와 혼인을 의논했다 하니 추잡함이 막심합니다.’ - 송시열 <기축봉사>
장유는 환향 부녀와 실행녀와 동일시했다. 이 사고방식은 곧이곧대로 장훤에게 적용되었다. 실절한 부인의 소생이므로 관직을 주는 것이 부적절하다는 주장이었다. 이런 사람이 관직에 있게 된다면 양반들의 ‘도덕적 우월성’이 훼손될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참고>
이숙인, <또 하나의 조선>, 한겨레출판, 2022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