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표현하기
한국인 정약용
대륙적인 스케일, 자유분방한 감정 표현, 절제되고 세밀한 정서. 한 중 일의 성격을 비교할 때 흔히 동원되는 단어들이다. 이중에서 한중을 비교하자면, 그림을 그릴 때도 차이가 있었던 듯하다. 중국은 사물의 모습 그 자체에 집중하는 바람에 개성이 부족한 반면, 조선은 사물은 하나의 모티브일 뿐 붓놀림이 핵심이었다. ‘나’를 보다 확실하게 표현한 셈이었다. 이런 차이는 여러 부분에서 드러난다. 이를테면, 동양의 고전인 <논어>를 해석할 때도.
‘교언영색(巧言令色)’. <논어>에 두 번 등장하는 구절이다. 이 구절을 놓고 주희(朱熹, 1130~1200)와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이 다른 의견을 내놓았다. 두 사람의 의견 차이가 흥미롭다.
주희는 ‘巧言令色, 鮮矣仁(교언영색한 사람 중 어진 이는 드물다)’에서 ‘선(鮮-거의 없다)’를 전혀 없다(絶無)로 해석했다. 교언영색을 절대악으로 규정한 셈이다.
반면 정약용은 조금 다르게 해석한다. 다양한 고전을 인용한 뒤 교언영색이 전부 나쁜 마음에서 나온 것은 아니라고 설명한다.
‘巧言令色不是悲惡(교언영색이 전부 악의에서 나온 것은 아니다).’ - <論語古今註>, <與猶堂全書> 第5冊, 총 24쪽.
교언영색이 절대 악이 아닌 이유는 상황에 따라 말과 표정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정약용과 비교해 주희는 조금 딱딱한 느낌이다.
주희와 정약용의 차이라기보다 중국인과 한국인의 차이로 다가온다. 이를테면, 상황에 대한 유연한 대처나 ‘입장’을 이해하려는 노력, 다양한 표현을 긍정하는 태도 등이 우리나라 사람의 중국인의 차이가 아닐까.
조금 비약해서 적용하자면 한국과 중국 배우의 감정 표현에도 이런 차이가 드러난다. 인물을 극화하는데 있어서 한국 배우는 보다 세밀하고 풍부한 정서를 드러낸다. 인물이 훨씬 입체적으로 살아난다. 반면 중국 배우는 (모 방송 관계자에 따르면) “중국 배우는 어떤 틀에 갇혀서 못 벗어나는 느낌”이다. 중국에서 한국 배우들이 인기를 끄는 것도 어쩌면 우리 내면의 복잡다단한 감정과 정서를 치밀하게 묘사해내기 때문이 아닐까.
같은 구절에 대한 주희와 정약용의 해석의 간극과 오늘날 한국과 중국인의 성격적 차이가 일맥상통하는 현상처럼 느껴진다. 이런 관점을 가지고 우리 조상들이 남긴 문헌이나 고전에 대한 해석을 잘 살피면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보다 확실하게 알 수 있지 않을까. 그런 공부는 아무리 많이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참고>
차이전펑 지음, 김중섭 김호 옮김, <다산의 사서학>, 너머북스, 2015, 8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