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이 있는 이야기

사업보국

프로시안 2022. 5. 28. 13:20

 

사업보국

 

 

 

 

 

 

“그것은 완전히 기적일 것”



‘특히 개발도상국에서 한국을 배우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어떤 국가는 도움을 요청했고, 어떤 나라를 우리가 부유해진 노하우를 배우려 했으며, 또 어떤 나라는 한국의 경제와 민주주의를 일종의 존경심을 가지고 부러움의 대상으로 여겼습니다.

...

그런데 5.16 군사 쿠데타가 없었다면 경제개발5개년계획(1962-1966)이 민주당 체제 아래서 실행될 수 있었을지 궁금합니다. 이 점에 대해 저는 확신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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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중소기업과 경공업에 집중한 경제발전의 길을 선택할 수도 있었는데, 우리는 대만과는 다른 길을 택했습니다. 결과와 관련, 사람들의 삶에 차이가 있나? 이러한 질문의 답을 찾고 싶지만 너무 바쁘고 능력이 없어 답을 찾지 못했습니다.’

- 2008년, 노무현 전 대통령이 퇴임 후 가진 인터뷰 중에서

 

 



1961년 박정희가 등장하던 즈음 에드워드 와그너라는 학자는 한국 경제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한국경제가 성장한다면) 그것은 완전히 기적일 것.”



도시의 실업률 25%, 1인당 국민소득 100달러 미만, 전력 생산 능력 멕시코의 1, 산림 4/3이 민둥산. 이것이 1961년 대한민국이 처한 현실이었다.



더 심각한 것은 문화적인 부분이었다. 1961년은 조선이 망한 지 겨우 50년이 흘렀을 즈음이었다. 전통적 사고 체계와 정서가 변하는 시간을 생각하면 아직 조선시대에 살고 있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기술자나 상공업이 그다지 각광받지 못했다.

 

 



‘우리의 부력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이라고 적었던 김구 역시 물질보다 정신을 강조했던 ‘조선 사람’의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박정희의 등장으로 양반문화 혹은 정신문화에 오로지하던 풍조가 먹고사는 문제 혹은 잘사는 방법에 대한 고민과 노력으로 전환되기 시작했다. 그는 ‘잘살아보세’나 ‘일하는 정부’ 같은 슬로건으로 명확한 목표와 방향을 제시했다. 그에게 있어 국정 최고 현안은 ‘경제개발’이었다. 경제기획원을 조직해 치밀하게 경제개발계획을 실행해 민간경제에 깊숙하게 개입했다. 공공부문과 민간부문을 구부하기 힘들 정도로 사기업을 지원하고 키웠다.



무엇보다 세계로 눈길을 돌렸다. 외국 기업과 경쟁하는 한국 기업을 적극 지원했다. 심지어 기업이 외국으로부터 차관을 도입하려고 하면 정부가 지불보증을 섰다. 외국에는 이런 사례가 없었다.

 

 



한국의 산업은 경공업 중심에서 벗어나 중화학 공업이 발전됐고, 이 과정에서 대기업이 급속도로 성장했다. 노무현 대통령이 말한 대로 대만과 전혀 다른 체질의 국가로 성장했다.



한 마디로 ‘사업보국’(사업을 통해 나라를 이롭게 한다)이었다.



‘정부는 기회 있을 때마다 우리의 경제발전의 주역을 맡고 있는 기업에 대해 능률을 향상시키고 국민의 기업으로서 그 사회적 책임을 다하도록 촉구해왔다. 더욱이 앞으로 중화학공업의 개발을 중심으로 한 고도 산업사회를 건설함에 있어서 모든 면에서 국제 수준에 뒤지지 않는 대규모의 기업화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며... 한편 기업인은 기업의 사회적 책임과 기능을 자각하고 기업의 문호를 널리 개방하여 참신한 경영체제를 확립함으로써 우리 기업이 명실상부한 국제적 기업으로 도약하고 우리 경제가 그 체질을 개선하여 번영의 80년대를 향한 또 하나의 전기를 찾도록 해야 할 것이다.’ - 박정희, 1974년

 

 



이 시절 외국의 학자들은 정부와 기업이 한 팀처럼 움직인다고 해서 ‘주식회사 한국(Korea, Inc)’이라는 조어를 만들어 붙였다.



미국 경제학자 앨리스 앰스덴은 당시 한국 대기업들을 ‘공공목적을 가진 사기업’이라고 해석했다. 그만큼 정부가 경제정책에 적극적이었던 것이다.



새마을 운동 역시 관료조직의 변화가 있어서 가능했다. 공무원들은 과거처럼 시민 위에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농민들에게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농업 정보를 제공하고 지원했다.



경제를 일으키는 일에 가치를 두고 관과 민이 손잡고 애를 썼고, 동시에 인식 변화도 시도했다. 이를테면 ‘장사꾼’을 ‘산업역군’으로 불렀고, 나라에 착취당하기나 했던 장인들은 국제기능올림픽에 나서 메달을 따오면 카퍼레이드를 시켜주었다.

 

 




이 시기에도 조선적 전통을 이어간 지식인들 중에는 기‘외세와 결탁한 매판자본가’ ‘군부독재 정권과 유착’ 등의 슬로건을 내걸고 먹고사는 문제에 치중하는 정치를 큰 가치를 부여하지 않았으나, 바깥에서는 그 시절 덕분에 먹고사는 문제에 더 신경을 쓰게 되었고 민주화와 문화강국으로서의 기반이 다져졌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참고>

김은희, <신양반사회>, 생각의힘, 2022년



▷ 에드워드 와그너 - 미국 오하이오주 클리블랜드에서 태어나, 1941년에 하버드대학에 입학해 1943년까지 공부한 후 육군에 입대해 1946년까지 근무했다. 이어 1946년부터 1948년까지 한국에서 미군정 문관으로 외교 업무를 담당했으며, 하버드대학으로 돌아와 1949년에 졸업하고 1951년에 동아시아 지역학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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