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귀
귀신의 탄생
‘우리나라 시인들은 서徐나 이李 같은 글자는 일찍이 사용한 사람이 없습니다. 게다가이 사람의 나이가 어리니 필시 시마(詩魔)에 걸렸을 것입니다.’
허균(1569 ~ 1618)이 쓴 시평서 ‘학산초담’에 실린 이야기다. 시마(詩魔), 즉 시마귀에 걸렸다고 추정되는 인물은 이현욱이었다. 그는 영의정을 지낸 이산해(1539 ~ 1609)에게도 호평을 받았으나 어느 순간 자취도 없이 사라졌다. 허균의 말대로 시마가 떠난 뒤 시를 짓는 재능도 사라져버린 것일까.
1114년(예종9)에 과거에 급제한 정지상(미상~1135)은 시귀(詩鬼)를 만났다. 산속 절에서 공부하던 시절, 달 밝은 밤에 누군가 시를 읊었다. 목소리는 절 건물 뒤쪽에서 흘러나왔다.
“스님은 보면서 절이 있나 의심하고, 학은 보면서 소나무 없음을 한스러워한다(僧看疑有刹 鶴見恨無松).”
정지상은 이것이 귀신의 음성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시귀가 왜 그에게 그런 시구를 들려주었는지는 과거 시험장에 들어가서 알게 되었다. 그날의 시제가 ‘夏雲多奇峯(여름날의 구름은 기이한 봉우리도 많구나)’였다. 정지상은 시귀에게 들은 구절을 집어넣어 시를 썼고 장원을 차지했다.
당시 시관은 (귀신에서 듣고 집어넣은) 3, 4구가 훌륭하다고 칭찬했다. 후대에서는 두 구절 외에는 특별한 구석이 보이지 않는다고 평했다.
조선 후기의 무신인 구수훈(1685~1757)이 쓴 ‘이순록’에도 시귀에 관한 언급이 있다. 그는 김창흡(1653~1722)이 사람의 형상을 한 시귀를 단번에 알아보는 능력이 있었다고 소개했다. 구체적인 사례도 언급했다.
선비 여러 명이 과거를 보러 서울로 가는 길이었다. 금강 부근에 이르러 궁원을 향해 하고 있을 때, 시간은 아직 새벽이어서 어둑한데 낯선 사람 두 명이 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이었다. 한 사람이 “궁원의 흰 조각달에 바람은 화살 같다(弓院月灣風似箭).”고 읊자 나머지 안 사람은 “금강에 어린 안개 버드나무는 실 같구나(錦江烟織柳如絲).”라고 했다. 일행 모두 시가 좋다고 감탄했는데, 나중에 김창흡에게 이 이야기를 전하자 그들은 시귀라고 했다는 것이었다.
때로 도깨비처럼 장난을 치기도 했다. 조선 초기에 활동한 문신이자 서예가였던 김안로(1481~1537)는 ‘용천담적기’에 시를 못 쓰도록 방해하는 시귀를 만난 이야기를 남겼다.
그는 1515년 일본 사신 선위사가 되어 응천에 갔다. 혼자 망호당에 앉아 시를 한 수 지었는데, 결국 이를 기록하지 못했다. 짐을 뒤져서 붓을 끄집어냈으나 촉(털 달린 부분)이 없었다. 방에 들어온 이도 없었을뿐더러, 마지막으로 쓴 사람도 자신이었기에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붓을 붓통에 집어넣었다. 잠시 후 출발하려고 다시 붓통을 열어보니 촉이 달려 있었다. 훗날 그는 지인에게 당시에 들었던 생각을 이렇게 설명했다.
“아마 그 길을 지나는 문인들이 시를 지어 정자의 현판으로 더덕더덕 붙여서 다른 사람들의 조롱을 받은 일이 많아 귀신으로서는 관행처럼 되었을 것입니다. 저의 부족한 시재가 후일 다른 사람의 조롱을 받을까 하여 귀신이 저로 하여금 시를 못 짓게 하려고 붓을 감추었던 모양입니다.”
그 외에도 서거정(1420-88)이 저술한 ‘동인시화’에는 정신이상자가 된 여자의 입을 통해 잃어버린 시를 되찾았다면 김지대의 이야기가 실려 있고, 남효온(1454~1492)은 ‘추강냉화’에서 3년 전에 죽은 안응세(1455~1480)가 꿈에 나타나 시를 지어주었다는 이야기를 실었다.
조선 시대 지식인들은 시는 가장 중요한 능력이었다. 과거시험에도, 술을 마시고 놀 때도, 때로 여행 중 사랑방에 들 때도 멋있는 한시를 척척 써내야 대접을 받았다. 한시는 곧 문화적 소양의 척도였고, 가장 중요한 교양이자 사회적 힘을 부여하는 요소였다. 책을 읽은 이라면 누구나 시를 쓰고, 시를 잘 쓰기 위해 애를 썼다는 것을 의미한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신들, 그중에서도 특히 지혜를 전하는 아테나 여신 같은 존재가 조선에서는 시귀, 혹은 시마로 통한 게 아닐까. 애쓰고 몰입하다 보면 마치 귀신이나 신적인 존재가 힌트를 준 듯 빼어난 아이디어를 얻어낼 때가 있다. 그 놀랍고도 짜릿한 순간을 신의 계시나 귀신의 귀띔으로 에둘러 표현한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지금도 시귀는 존재한다.
참고>
김풍기, <한시의 품격>,창비, 2014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