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군
중국이 변비 걸렸는데 왜 조선이 똥을 못 눠?
광해군은 세자 책봉을 받지 못한 상태로 왕좌에 올랐다. 왜 그렇게 깐깐하게 나왔을까? 그건 광해군 자체의 문제보다는 명 나라 내부의 사정 때문이었다.
명의 제13대 황제 만력제(1572~1620)는 셋째 아들을 후계자로 삼고 싶어 했다. 그러자 신료들이 들고 일어났다. 적자가 없을 경우 장자를 권좌에 올려야 한다는 원칙을 깨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 ‘장자상속’은 명나라에서 자연법처럼 당연한 원리였다.
이 문제는 1586년 이후 만력제가 명을 다스리는 내내 민감한 사안으로 남아 있었다. 이때 조선에서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해 달라고 요청해왔다.
“어, 장자가 아니잖아? 안 돼!”
명의 예부는 단호한 태도를 보였다. 만일 조선에서 장자상속이라는 원칙을 어기도록 허용한다면 명 내부 문제가 폭발할 것이었다. 그들은 황제에 맞서 내세운 논리에 균열을 일으키지 않기 위해 조선의 요청을 거듭 거부했다.
1601년 결국 장자가 태자로 책봉되었다. 그럼에도 갈등은 가라앉지 않았다. 황태자 책봉 이후에도 경쟁자가 13년이나 북경을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명의 법(대명률)에 의하면 황제의 삼촌, 조카, 형제, 아들 등 황족은 성인이 되면 북경을 떠나야 했다. 황태자가 이미 정해졌는데도 그대로 북경에 남았다는 것은 정치적 안정을 바라는 이들에게는 상당히 위협적인 일이었다.
광해군도 피해자였지만 더 큰 피해는 장자인 임해군이 봤다. 그는 장자의 권리를 빼앗겨 여느 왕자나 다를 바 없었으나 명나라의 상황 때문에 상당히 위험한 존재로 급부상했다. 조선 사신이 “임해군이 중풍이 있어 왕위를 사양했다”고 말하자 명에서는 이를 조사하기 위해 사신을 파견할 정도로 예민하게 나왔다.
책봉을 놓고 명이 이렇게 깐깐하게 나온 적은 없었다. 중종(1506~1544)이 정변으로 왕위를 차지했을 때도 (연산군은 이미 죽었지만) 연산군이 중병에 걸려 정사를 돌볼 수 없어 아우에게 왕권을 넘겼다고 둘러대고 책봉을 청했으나 명에서는 대비의 추본이 필요하다는 절차상의 요구를 해왔을 뿐 조선의 의향을 순순히 따랐다.
특별조사관이 파견돼 국왕을 심문하는 지경에 이르자 더 이상 임해군을 둘 수 없다고 판단했다. 일부 대간이 임해군이 몰래 무기를 저장하고 무인들을 불러들였다는 보고를 올렸고 신하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광해군에게 임해군을 제거할 것을 요구했다. 광해군은 ‘예의상’ 거절했다. 수용할 수도 없었다. 권력을 위해 형제간의 우애를 버렸다간 유교 국가에서 무슨 말을 들을지 알 수 없었다. 묘수가 필요했다. 전인살해. 정적 살해를 모른 척해주고 죽은 뒤 슬픈 척하는 방법을 택했다.
얼마 후 임해군이 병으로 죽었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병에 대한 말이 전혀 없던 상황에서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이었다. 광해군은 몹시 슬픈 표정을 지었으나 병에 걸렸을 때 진작에 보고를 올리지 않은 별장에 대해 별다른 벌을 내리지 않았다.
정치적 목적이 달성되었고, 임금이 살해를 명하지도 않은 만큼 윤리적인 요구도 충족되었다. 더 이상의 퍼포먼스는 필요 없었다. 그렇게 명분을 충족시키고 실리를 챙겼다. ‘광해군호’는 그렇게 안정적인 항해를 시작했다. - 당시에는.
참고>
계승범, <모후의 반격>, 역사비평사, 2021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