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이 있는 이야기

경주

프로시안 2022. 3. 16. 20:09

경주

 

 

 

 

 

 

“문이 작아? 헐어버려!”



지역마다 전통이 있고, 또렷하게 드러나지 않지만 과거가 남긴 뉘앙스가 은은하게 깔려있다. ‘택리지’를 쓴 이중환은 경주에 대해 ‘아직도 옛 도읍지(한 나라의 서울로 삼은 곳)의 풍습이 남아 있다’고 썼다. 구체적인 설명은 없다. 사람들에게서 어떤 뉘앙스를 읽은 게 아닐까.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의 수도이던 시절 경주에는 성안에 초가집이 하나도 없었다고 할 정도로 번성했다. 고려 성종 때인 987년에는 고려 3경 중의 하나인 동경이 설치되었다. 고려 시대에, 특히 몽골의 침입으로 많은 문화재가 황폐화되거나 사라졌지만 옛 도읍의 분위기를 그대로 가지고 갔던 듯하다.


 


조선이 들어선 후, 경주에 경상도 감영이 들어섰다. (1408년에 상주에 옮겼다.)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15세기 중반 경주부의 인구는 5,894명이었고 성안에는 80개의 우물이 있었다. 1789년 자료에 따르면 경주부 인구는 7만 1,956명이었다. 인구로만 따지면 경상도에서 1위였고, 전국으로 확대하면 서울, 평양, 의주, 충주, 전주에 이어 여섯 번째였다.


 


경주읍성은 고려시대에 건축되었다. 이후 여러 번 확장하고 수리했다. 성곽의 높이는 5~6미터, 둘레는 2.3km 규모였다.



신라의 도읍지에서 3경 중의 하나에 해당하는 동경이 위치한 지역, 조선에 들어서는 감영이 자리 잡은 곳, 이중환이 ‘아직도 옛 도읍지(한 나라의 서울로 삼은 곳)의 풍습이 남아 있다’고 기록한 경주가 세상이 바뀌었음을 뼈저리게 느낀 것은 1912년이 아니었을까. 대구읍성이 1907년에 무너진 이후 912년에 경주읍성이 해체되었다. 그 사연이 처량하다. 대구는 한반도로 건너온 일본 이주민들이 성안 상관을 무너뜨리려고 성벽을 헐었다고 하지만, 경주는 그보다 더 어처구니없는 이유로 유구한 역사의 종지부를 찍었다.



1912년 조선총독부 총독인 데라우치 마사다케가 경주를 방문했다. 이때 경주읍성의 남문이 헐렸다. 총독이 차를 타고 성안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이유였다. 점령군답데 문을 무너뜨리고 성안으로 당당하게 들어왔다. 이후 성벽을 계속 철거했다. 성벽 돌은 철길을 까는데 썼다. 1932년에 이르자 동쪽의 일부 구간만 살아남고 나머지 성벽은 모두 무너졌다.



이중환이 이 모습을 봤다면 뭐라고 했을까? ‘옛 도읍지였음을 웅변하는 건축물 하나가 점령군에 의해 파괴되었다’라고 하지 않았을까. 나라를 잃은 뒤에도 지역의 중심으로 활약하다가 ‘왜구’의 침략에 성벽마저 빼앗겨버린 도시, 경주의 문화에서는 이런 뉘앙스가 남아 있지 않을까. ‘신라의 달밤’에 담긴 쓸쓸한 정서가 느껴진다.



참고>

정치영 홍금수 김종근, <한국 중소도시 경관사>,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202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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