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이런일이
“내게 왜 이런 일이!” 그럴 땐 이렇게...
뭇 사람들의 칭송도, 권력자의 신뢰도, 한껏 자세를 낮춘 겸손과 검약도 소용없었다. 보통 사람 같으면 셋 중 하나만 잡아도 인생이 평탄했을 테지만, 이 사람은 세 가지를 두루 갖추고도 결국 삶의 고비를 맞았다.
신흠(1566∼1628)의 이야기다. 명성으로 치면 이식, 이정구, 장유와 더불어 한문 4대가의 한 사람으로 꼽혔고, 선조가 승하할 때 영창대군의 보필을 부탁한 일곱 명의 신하에 속했고(유교칠신), 아들(신익성)이 선조의 딸 정숙옹주에 장가들 때도 나라에서 좁고 누추한 집을 수리해주려 했으나 “예를 행하기엔 충분하다”는 말로 이를 고사했다. 한 마디로 ‘흠’ 잡을 데를 찾기 힘든 행적과 인품이다.
그런 그에게도 고난의 시절이 찾아왔다. 1613년 계축옥사로 조사를 받았다. 죄를 잡아내진 못했으나 벼슬을 빼앗고 김포로 보냈다. 얼마나 억울했을까.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이런 오명을 입게 되었으니 차라리 혹형을 받고 죽고 싶다!”
유배지에서 비극을 맞았다. 큰딸이 아버지를 만나러 왔다가 산후 후유증을 이기지 못하고 사망했다. 그 사이 큰누님도 돌아가셨다. 이웃하며 살던 이항복이 유배지에서 별세했다는 소식도 들었다. 참담한 마음이었을 것이다.
거처도 처참했다. 김포에 내려갔을 때 처음에는 두칸 짜리 집에서 살았다. 집안에 딸린 처자와 노비들이 기거할 곳이 없었다. 이듬해 아들이 열칸 짜리 집을 마련해주었다. 그는 건물마다 이름을 지었다.
독립된 건물인 실(室)은 ‘감지와坎止窩’, 중심 건물인 당(堂)은 ‘수심睡心 ’, 책 읽는 재(齋)에는 ‘초연超然’, 헌(軒)에는 ‘해월海月’일하는 이름을 붙였다. 감지는 구덩이에서 쉬고 있는 물, 수심은 자고 있는 마음, 초연은 말 그대로 초연한 마음을 뜻하는 말이었다. 그렇게 마음을 다스렸던 것이다.
유배가 끝난 뒤 그는 다시 조정에 돌아가 영의정까지 올랐다.
어떤 고통은 이유 없이 찾아온다. 그리고 피해갈 수 없다. 옛 책이나 이미 경험한 선배들의 조언을 통해 그런 시간을 비교적 수월하게 견디는 방법을 미리미리 챙겨두는 것도 한 방법일 듯.
참고>
안나미, <조선 금수저의 슬기로운 일상탐닉>, 의미와재미, 2021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