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이 있는 이야기

호구조사

프로시안 2021. 10. 6. 22:18

호구조사

 

 

 

 

 

 

 

 

 

 

길 사이를 바쁘게 뛰어다니며 울부짖었다



1888년 지금의 영덕 지역이 발칵 뒤집어졌다. 호구분쟁이 터졌다. 호적업무를 맡은 관리가 뇌물을 먹고 호구 수를 조정하는 등 비리를 저질렀고, 이에 지역 양반들이 크게 반발했다.

 

 

 

 



사건의 발단은 최종 책임자의 부재였다. 1887년 겨울에서 1888년 봄 사이에 기존의 부사가 떠난 후 신임 부사가 도착하기까지 3달이라는 공백기가 생겼다. 호적 담당 아전은 아무런 통제 없이 자신에게 주어진 권력을 휘둘렀다. 자기 마음대로 호수를 조정했다. 나름대로 원칙도 정했던 모양이다. ‘수십 냥에 1호’, ‘40~50냥에 2호’를 줄여주었다. 어떤 마을을 300~400냥씩 헌납하기도 했다. 돈을 안 내면? 보복이 돌아갔다. 죽은 사람을 끼워 넣는 등의 수법으로 3호에서 7호까지 올려잡았다. 이 호구조사를 바탕으로 집집마다 부역이 내려질 것이었지만 항의하는 이에게 호구 담당자는 형식적인 문서라고 둘러댔다. 그 결과는?


 

 


‘궁벽한 읍의 피폐한 백성이 당황하여 본업을 잃고 보리도 거두지 않고 모내기도 하지 않으며 길 사이를 바쁘게 뛰어다니며 울부짖었다.’

 

 

 



조선 시대에는 호구조사와 관련해 어느 정도 융통을 허락했다. 조선초만 하더라도 호구를 정확하게 조사했으나 이후 ‘너그러운’ 조사를 권장했다. 과중한 세금을 피해 도망하거나 부역을 피하는 현상이 늘어나자 엄격한 조사가 현실을 모르는 원칙주의로 비치게 된 때문이었다. 마을 자체에서 스스로 장부를 만들어 요역과 부세를 할당하게 하고 관에는 그 대강을 들어 총수를 파악한 뒤 균평하게 되도록 힘쓰는 식이었다. 영덕 지역의 경우 현실을 감안한 융통을 담당 공무원이 집요하게 파고들어 사적인 이득을 취한 셈이었다.



피해를 본 마을들은 강력하게 반발했다. 양반들이 모여 사는 마을들이 특히 그랬다. 이들은 관에 상서를 올렸다. 여러 명이 함께 올린 민원인이었다. 나름 힘깨나 쓰는 이들이었으나 항의가 즉각 항의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오히려 흐지부지되었을 가능성이 컸다. (결론을 단정지을 수 있는 자료가 나오지 않았다.)

 

 

 



이유는 두 자기였다. 하나는 숱한 단계를 거쳐 중앙에까지 의사를 전달하기가 쉽지 않았다. 또 하나는 부사나 감사가 실무를 쥐고 있는 아전들을 온전히 무시할 수 없었다. 상당 부분 아전들의 실무 정보 혹은 능력에 의존해야 했다. 자의 수족이나 다름없는 이들을 단호하게 다룰 수는 없었다.



지금은 지방자치제의 시대다. 지자체장과 공무원의 결탁이 비일비재하다. 아무리 구린 구석이 많아도 표만 얻으면 권한이 연장된다. 이들을 감시하고 비리를 공론화하는 세력이 필요하겠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표를 주는 주민들의 의식이다. 이들의 사고와 의지가 지역 정치와 행정의 수준을 좌우한다.



참고>

미야지마 히로시 외 지음, <동아시아의 근대 장기지속으로 읽는다>, 너머북스, 202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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