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이 있는 이야기

전통사회

프로시안 2021. 9. 30. 20:44

전통사회

 

 

 

 

 

 

 

 

 

 

일제강점, 양반들은 어떻게 살아남았나



일제가 한반도에 마수를 뻗친 이후 전통문화가 철저하게 짓밟혔다. - 보통 그렇게 생각한다. 그렇다면 양반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 독립운동을 위해 만주로 떠나간 몇몇 가문을 생각하면 철저히 외면당하고 붕괴되었을 것 같다.



전남 장흥 지역의 전통 문화와 양반 세력을 들여다보면 생각이 달라진다. 양반 세력만 놓고 보자면 오히려 더 힘이 강화된 느낌까지 든다.

 

 

 



전통 사회에서 양반들이 지방에서 차지하는 직즙 중에 향교 교임이 있었다. 일제강점기에 장흥에서 내로라는 성씨가 교임 자리에서 차지한 비율은 50%이상이었다. 19세기만 해도 세가 약한 가문에서 조금씩 치고 올라오는 모양새였으나 강점 이후 30년대까지 오히려 쟁쟁한 가문의 독점이 강해졌다.



‘전통적 엘리트’들은 양반의 권위 과시를 위해 다양한 사업을 추진했다. 그중 하나가 읍지였다. 지역의 역사와 경제적, 지리적 상황이 세세하게 담기는 읍지는 전통적으로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와 지방의 유력 가문에서 비용과 인력을 차출해 제작했다. 읍지 제작을 주도한다는 것 자체가 지역의 중심 세력이라는 증거였다. 장흥의 경우 1747년에 마지막으로 제작한 후 20세기 들어 1910년과 1938년 연이어 발간했다. 특히 1938년에 나온 읍지에는 군 현황에 관련된 통계 및 행정에 필요한 정보가 상세하게 실렸다. 이는 장흥군 양반 세력이 지역 사회 운영에도 깊이 관여했다는 점을 시사한다.

 

 

 



정리하자면, 양반들은 세상이 바뀐 초기에는 고전했으나 전통의 권위를 강화하는 동시에 근대적 지방행정체제에도 급속도로 파고들었다. 1930년대에 이르러 이들은 향교 교임직을 절반 이상 차지했는가 하면, 교임 중 45%가 면장이나 면협의원을 지냈다. 1927년, 장흥군에서 각 면에 1명씩 배정한 학교평의원 11인 중에서 5명이 향교 교임 출신이었다. 이들은 ‘전통적’ 권위를 강화하는 동시에 근대적 권력도 장악해나갔다. 양반들의 전통적 권위와 네트워크를 작동시켜 전통의 힘과 근대를 모두 장악해나간 것이었다.

 

 

 

 




신흥세력이 성장한 이후에도 이들은 경쟁력을 유지하려 애썼다. 신흥세력의 실체는 읍내를 중심으로 형성된 사회주의 청년들이었다. 과거 후미진 지역으로 취급받던 대덕면에서 일어난 3.1운동과 연계된 이들, 그리고 향리층의 후예로 구성된 읍내 청년 세력들이었다. 이들은 주류 양반들과 대립과 연대를 교차하며 지역사회를 이끌어갔다.



일제가 들어오면서 전통적 세력은 분쇄된 것 같지만 이들은 ‘과거의 전력’을 강화하고 새로운 물결에도 몸을 던지면서 끝끝내 살아남았다. 권력의 생명력은 힘없는 자들의 저항만큼이나 끈질기고 모진 구석이 있다.


 

 

 

 


우리 사회는 어디쯤 와 있을까. 소위 586과 청년 층의 대립이 점점 격화하는 모양새다. 586년은 자신들의 윗세대, 간단하게 말해 ‘적페의 근간’이 되는 세대가 뿌리뽑히면 세상이 개벽할 것처럼 이야기했지만 그들은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지 않은 면모를 보여주었다. 다양한 실험들이 실패하면서 힘이 모두 빠진 모양새다. 그럼에도 몰락을 단정짓긴 이르다. 일제강점기의 양반들처럼, 그들도 더욱 결집해서 새로운 전략과 모토를 내걸고 세를 키우려 들 것이다.



참고>

미야지마 히로시 외 지음, <동아시아의 근대 장기지속으로 읽는다>, 너머북스, 202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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