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이 있는 이야기

경제 공황 준비

프로시안 2021. 2. 24. 21:29

경제 공황 준비

 

 

 

 

 

 

 

“이런 불공평한 나라가 과연 오래갈 것 같습니까?”



태국 국민들이 두 달 넘게 반정부 시위를 벌였다. 대학생과 시민들이 연합한 ‘민주화 시위’다.

 

 

 



시위의 도화선이 된 사건은 이른바 ‘레드불 스캔들’이다. 레드불 창업주 찰레오유위티야의 손자인 오라윳유위티야(35)가 페라리를 타고 시속 177km로 과속하다 오토바이를 타고 근무 중이던 경찰관을 차로 치어 숨지게 했다. 과속, 음주 운전, 코카인 복용이 의심되는 상황이었음에도 보석금 50만밧(약 1900만원)을 내고 풀려난 데다 지난달 태국 검찰이 오라윳에게 유리한 증언을 들어 과실치사 혐의에 대해 불기소 결정을 내리면서 비난 여론이 다시 들끓었다. 진상조사 결과, 정부 고위 관계자들과 변호사, 검사 등이 오라윳의 기소를 막으려고 공모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레드불 스캔들, 군주제 폐지 등 드러난 구호는 지극히 정치적이지만 이면에는 경제 상황이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태국 경제는 올해 2분기에 –12.2%나 역성장 기록했다. 1997년 한국의 외환위기에 선행했던 아시아 재정위기 이후 최악이다. 100만개 이상의 일자리가 사라졌다. 취업에 실패학 대학졸업생과 젊은이들이 반정부 시위대를 키웠다는 분석이다.



미국에서 벌어졌던 인종 관련 시위 역시 직접적인 원인은 조지 플로이드 사망사건이지만, 시위대의 규모가 불어난 것은 코로나19로 인한 경제난이라는 분석은 학자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548년, 5호16국 시대 양나라에 반역 사건이 일어났다. ‘후경의 난’이었다. 후경이 군대를 이끌고 황제가 있는 대성으로 올라왔으나 황제(양무제)는 코웃음을 쳤다.



“그 자가 어리석게도 스스로 죽을 길로 들어섰구나.”



수많은 신하들이 그에게 맞장구를 쳤을 것이다. 충분히 그럴 만했다. 후경이 군대를 일으킬 당시의 인원은 8,000명이었다. 양무제는 30만이었다. 게다가 당시는 황족과 귀족이 거느린 군사가 많았다. 양무제의 여섯째 아들인 소륜은 군대가 20만에 가까웠다. 그 외의 황족들이 가진 군사를 모두 넘으면 30만 명이 넘었다. 이들까지 황제를 구하러 온다면 전세는 불을 보듯 뻔했다.



후경의 됨됨이만 봐도 그의 패배는 뻔해 보였다. 가는 곳마다 약탈과 학살을 했고, 저항하는 자들은 잔혹하게 죽였다. 반면 양무제는 성군의 모습이 보였다. 빨래도 직접 했고, 고기와 생선은 입에 대지 않았다. 채솟국에 현미밥이 보통 밥상이었다. 이불도 한번 덮으면 2년은 바꾸지 않았다. 새벽에 일어나 추위와 싸우며 결제를 하기도 했다.


 

 


양나라(502~557)는 부강했다. 건국 초기 강한 군대를 자랑했다. 전쟁이 끊이지 않던 시대, 그가 발탁한 장군들은 무척 유능해서 쳐들어오는 북위의 군대를 잘 막아냈다. 507년 종리성 전투에서 명장 위예(442~520)는 북위군 20만을 죽였고, 526년에 일어난 전쟁에서는 명장 진경지(484~539)가 북위를 공격해 52개의 성과 포로 7만5,000을 획득했다. 주변국을 잘 막아낸 덕에 나라 안은 경제적으로 번영했다. 수도인 건강의 인구는 140만명(28만호)이었다. 도시 안에 불교 사찰이 500개나 있었는데, 황금과 은, 구리로 불상을 제작했다. 황족과 고위관료는 첩이 수십에서 100에 이르렀고, 화려한 보물로 마차를 장식했다. 풍요의 극치였다.



양무제는 승리를 자신했다. 그러나 세상은 양무제의 편이 아니었다. 후경의 군대는 10만으로 불어났고, 성이 봉쇄되었는데도 황족 중 어느 누구도 구하러 달려오지 않았다. 결국 양무제는 후경에게 붙잡히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문제는 실업자였다. 황족을 비롯한 측근들이 막 나갔다. 고리대금업으로 백성들의 재산을 몰수하거나 생업을 무너뜨렸다.

 

 



‘소굉은 사치스럽기가 지나치고 재물을 모르면서 만족할 줄 몰랐다. (그가 재물을 모아둔) 창고는 거의 100칸에 이르렀으며, 넣어둔 돈이 3억여 만 전에 달했다. 소굉은 도하에 수십 개의 저택을 가지고 있었는데, 돈을 걸어놓고 문서를 담보했고, 매번 전지와 저택, 가게를 계약문서에 올려놓았으며, 기한이 되어서는 담보를 붙인 주인을 위협하여 그 집을 빼앗으니, 도하와 동부에 사는 백성들 중 직업을 잃은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니었다.’



양무제의 여섯 번째 동생 소굉에 대한 기록이다(‘자치통감’).



“살림이 제법 좋구나.”



소굉을 방문한 양무제가 던진 말이었다. ‘어떻게 이런 어마어마한 규모의 재산을 모았느냐’하고 다그치길 기대했던 ‘양심가’들은 크게 실망했다.


 

 


양무제가 이런 태도를 취한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불심이었다. 그는 자비로 세상을 다스릴 수 있다고 믿었다. 또한 이런 자비심을 바탕으로 일가친척을 감싸줘야 충성도가 높아지고 황족 간의 골육상쟁이 일어나지 않아 나라가 안정된다고 생각했다.



양무제가 행차할 때 한 노인이 어가를 막고 외쳤다.



“폐하의 법은 힘 있는 자들에게는 너그럽지만, 가난하고 힘없는 백성들에게는 가혹합니다. 이런 불공평한 나라가 과연 오래갈 것 같습니까?”



측근에게만 자비롭고 공정이 무너진 나라였다. 반역의 기운이 불자 작은 불씨는 얼마 안 가 불의 쓰나미가 되었다.

 

 



황족과 귀족 때문에 집과 일자리를 빼앗긴 사람들은 후경의 휘하로 들어가 ‘일자리’를 얻을 수 있었다. 겉으로만 번지르르한 풍요보다는 먹고살 길이 요원했던 백성들에게는 당연한 선택이었다. 게다가 노비들의 신분을 해방시키면서 그는 ‘인권’이라는 측면에서는 큰 점수를 얻었다. 당시의 신분 해방은 지금으로 치면 공정에 해당할 것이다. 타고난 것에 상관없이 공정하게 경쟁할 수 있는 시스템은 노비라는 신분이 없는 사회에서 노비가 있던 사회에서 느끼는 신분해방 이상의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태국의 시위가 어디로 튈지 알 수 없다. 하필 코로나라는 사태에 직면에 이런 고초를 겪는다고 생각하면 태국 왕실의 위기는 억울한 측면이 있다. 그럼에도 평소 이런 부분에서 발전을 이루어두었다면 개혁 요구는 다른 부분으로 흘러가지 않았을까.



누가 봐도 좋은 결론에 도출한다면 코로나라는 위기로 역사의 진전을 이룬 사례로 역사에 남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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