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이 있는 이야기

온돌방

프로시안 2021. 2. 22. 18:53

온돌방

 

 

 

 

 

 

 

 

캘리포니아 산불... 그리고 400년 넘게 지속된 화재

 

캘리포니아 산불이 심상치 않다. 불이 오리건주와 워싱턴주까지 번졌고 수십 명이 사망했다. 화재가 대선 주요 이슈로 떠올랐다.

 

화재 면적이나 피해 상황과 함께 이슈가 된 단어가 있다. ‘기후 변화’. 산불이 나기 전 캘리포니아는 50도를 넘는 온도를 기록했다. 폭염에 이은 낙뢰로 인한 산불이 예삿일로 보기는 힘들다는 것이다. 캘리포니아 주지사의 말대로 기후변화에서 비롯된 피해가 본격화하는 신호탄일 수도 있다.

 

 

 

 

세계가 직면한 무더위와 화재 만큼은 아니더라도 우리도 이와 비슷한 인재를 경험한 일이 있다. 수백 년 간 그치지 않은 화재가 한반도의 산야를 휩쓸었다. 화재의 현장은 아궁이였다.

 

아궁이가 산의 나무를 집어삼키기 시작한 것은 임진왜란 이후였다. 요즘 사람들은 옛집엔 무조건하고 방방마다 온돌이 깔렸다고 생각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성균관) 기숙사의 한 귀퉁이에 온돌방을 만들어 환자의 휴양 장소로 삼게 하였고, 의원으로 하여금 진료하여 치료하게 하였다’ - ‘태종실록’, 1417년 윤514

 

성균관에서 양호실에만 온돌을 깔았다. 방방마다 깔았던 게 아니다.

 

 

 

 

임진왜란 이후 상황이 사뭇 달라졌다. 1681년에 태어나서 1763년에 돌아가신 성호 이익 선생은 성호사설 일찍이 노인들에게 들었는데, 100년 전에는 공경대부의 너른 집에도 온돌이 한두 칸에 불과하였고, 그마저 노인과 병자를 위한 것이었으며, 나머지는 모두 마루 위에서 잠을 잤다고 한다는 기록을 남겼다.

 

이익이 태어나기 40여년 전에 저술된 이수광의 지봉유설에는 수 십리 이내에는 이런 솔도 또한 남은 것이 없고, 사방의 산이 붉게 되어 보기에도 참담하다는 언급이 있다. 1641경의 기록이다.

 

영조가 1760년에 준천사(濬川司)’를 설치해서 청계천 정비사업이 나선 것도 결국은 아궁이 화재 때문이었다. 영조는 청계천 토목공사를 하면서 한성부 곳곳에 사는 사람들을 모았다. 그러자 불만의 목소리가 나왔다.

 

천변에 사는 사람이야 자기 일이지만, 멀리 떨어져 사는 백성은 억울합니다!”

 

 

 

 

영조가 이렇게 타일렀다.

 

개천가에 사는 사람들이 고통을 받는 것은 산 밑에 사는 사람들이 소나무를 베고 마음대로 경작하여 모래와 자갈이 흘러서 개천에 쌓이기 때문이다.” - ‘준천사실’, 1760

 

영조 다음 임금인 정조는 식목왕이라고 불릴 정도로 나무를 좋아하고 또 많이 심었다. 영조에게 생태교육을 제대로 받은 결과가 아니었을까.

 

 

 

 

온돌은 영정조 이후로도 한국의 산을 벌거숭이로 만드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었습니다. 어른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60~70년대까지만 해도 시골에서는 겨울이 엄청 추웠다고 한다. 이것 역시 산에 나무가 많이 없었던 까닭이 아닐까. 산에서 나무를 베는 건 사라졌지만, 그럼에도 화석연료의 사용으로 기후변화에 가세하고 있다는 점에서 온돌 사태는 아직도 진행형이다.

'생각이 있는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경제 공황 준비  (0) 2021.02.24
전쟁과 사람  (0) 2021.02.23
희망봉 발견  (0) 2021.02.20
물류산업이란  (0) 2021.02.19
미국 독립일  (0) 2021.0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