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사람
소녀
일곱 살 소녀는 아랫배가 묵직했다. 하루종일 아버지의 손을 잡고 걸었다. 오후부터 오줌을 마려웠지만 반쯤 넋이 나간 아버지를 놓칠까봐 내내 꾹꾹 참았다.
오줌이 신발이 튀겼다. 소녀는 무의식중에 엉덩이를 옆으로 틀었다. 삐죽 솟은 나뭇가지 하나가 엉덩이를 쿡, 찔렀다. 생채기가 날 만큼 세게 찔리진 않았다. 그러면 그만이었다. 안도를 숨을 쉬고 어두운 들판을 걸어 아버지와 가족이 있는 곳으로 갔다. 그렇게 푹 쓰러져서 잠에 빠져들었다.
1948년 5월30일 창군한 지 여섯달쯤 지난 공산당군이 창춘에 들이닥쳤다. 창춘은 국민당군이 주둔하고 있었고, 20만에 이르는 공산당군은 도시를 철조망 안에 가두었다. 그 안에는 국민당군 10만과 민간이 50만이 있었다. 식량이 떨어지고 추위가 찾아오자 사람들은 필사의 탈출을 했다. 국민당군이 쳐놓은 65킬로미터의 철조망과 공산당군이 친 95킬로미터 길이의 철조망 사이에 죽음의 회랑이 형성되었다.
소녀는 다음 날 해가 뜬 뒤에야 어젯밤 엉덩이를 찌른 나뭇가지를 보았다. 그것은 사람의 손가락이었다. 두 철조망 사이의 회랑에는 시체가 널려 있었다. 소녀는 시체 더미 앞에서 볼일을 보았던 것이었다.
소녀의 부친은 일본인이었다. 만주국의 수도에서 창춘은 약물중독 치료를 만든 제약기술자였다. 일본이 패망한 뒤 미군 감시 아래 ‘100만 송환’ 작전이 이루어졌으나 소녀의 아버지는 제약 기술 때문에 도시에 억류되었다. 그리고 국공내전이 터졌다.
전쟁이 불러온 궁핍은 끔찍했다. 7남매 중 막나가 태어났으나 몇 달도 넘기지 못하고 죽었다. 동생 하나도 삶을 견디지 못하고 떠났다. 스무명 남짓한 일본인들과 함께 피난을 떠났다.
소녀의 다이에 부종이 생겼고 두피엔 고름이 나왔다. 머리를 긁으면 손톱에 빠진 머리털과 고름이 엉켜 있었다. 아빠를 놓치면 안 된다는 일념으로 고통도 슬픔도 심지어 크게 놀라지도 않으면서 걷고 또 걸었다. 다만 온 몸이 아프고, 배 고프고, 잠이 쏟아져 견디기 힘들었을 뿐이었다.
‘손자병법’을 쓴 손무는 공성전을 최후의 전술이라고 했다. 웬만하면 쓰지 말라는 뜻이었다.
포위는 5개월 가까이 이어졌다. 도시에는 생필품이 바닥났다. 하루 200명이 넘는 시민들이 국민당군의 철조망 밖으로 빠져나왔다. 그들은 공산당군이 쳐놓은 철조망 앞에서 절망했다. 보초는 50미터마다 서 있었고, 무릎을 꿇고 살려달라고 간청했다. 어떤 이들은 보초가 보는 앞에서 목을 매고 자살했다.
그 사이 한파가 닥쳤다. 사람들은 묘지를 파내서 관을 불태웠다. 추위를 이기기 위해서였다. 인간의 시체를 파먹은 짐승들을 사냥해서 식량으로 삼았다. 죽 한 사발에 소녀가 팔려가고 노인과 고아, 환자들은 하릴없이 굶주렸고, 대부분 죽었다. 이 포위 작전으로 최소 12만, 최대 33만이 사망했다.
공산당군의 눈앞에 펼쳐진 비참한 광경에 지도부가 흔들렸다. 지도부는 내전의 승리만이 ‘반제, 반봉건 혁명’의 유일한 방법이라고 봤다. ‘인민 해방의 성전’이라는 기치를 내건 전쟁에서 너무 많은 인민이 그것도 의도적으로 희생되는 장면은 공산당군 군대의 정체성이 의구심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당시 젊은 군인들에겐 의구심이었으나 이 참상의 한가운데를 헤쳐온 소녀에게는 특별한 확신을 심어주었다. 창춘 봉쇄작전 당시 소녀였던 엔도 호마레는 70세가 넘어 ‘마오쩌둥: 일본군과 공모한 남자’(2015년)라는 책을 펴냈다. 일본 내 서평에서 ‘중국 연구의 1인자’로 평가한 저자의 저술에 따르면 마오쩌둥은 장제스 및 국민당과 관련된 고급 정보를 일제에 넘기고 거액의 돈을 챙겼고, 중국공산당 세력 확장을 위해 일본과 밀약을 체결하기도 했다. 무방비로 비극에 노출되었던 소녀의 복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