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이 있는 이야기

같은 공간 다른 시간

프로시안 2021. 7. 18. 15:30

같은 공간 다른 시간

 

 

 

 

 

 

 

 

신천과 대구천



「“저 앞이 대구천이에요?”

멈춰 서서 기다리고 있는 나를 보며 어머니가 말했다.

“조선인은 신천이라고 해. 대구천이라고는 하지 않는 모양이야.”」

 

 

 



모리사키 가즈에(森崎和江, 1927년 4월 20일 ~ )는 일제강점기에 대구에서 태어났다. 이후 일본으로 돌아간 인물이다. 그는 대구에서의 추억을 담은 몇 권을 책을 냈다. 그 책의 한 대목이다. 일본인들은 신천을 ‘대구천’이라고 부르고 대구민들은 ‘신천’이라는 원래의 명칭을 바꾸지 않는다는 내용이다.



변함없는 부분은 있었다. 강점기가 시작되기 전부터 대구는 서울, 평양과 함께 상업의 중심지였다. 약령시의 경우 청나라와 에도시대(1603~1867)의 일본과도 교역을 했다. 대마도를 통한 교역이었다. 이런 상업 중심지로서의 위상은 식민지 시대에도 변함이 없었다. 서문시장에는 장날이 서면 사람들로 북적댔다. 인구는 해를 거듭할수록 늘어 1926의 대구엔 한국인 15만, 일본인 3만이 거주했다.

 

 

 



‘그런데 조선에 들어온 일본인들은 시장에서는 장사를 하지 않고 시가지를 만들었는데, 순식간에 성벽도 철거되어 신시가지가 펼쳐졌다.’



작은 자금성 같다는 평가를 받았던 대구읍성에 대한 이야기다. (그 읍성이 지금까지 남아있었다면 문화재로서 관광자원으로서 얼마나 큰 가치를 가질까?) 읍성은 일본파 조선인들과 일본인들이 손을 잡고 무너뜨렸다. 읍성과 함께 성안 상권도 무너졌다. 일본인들에게 조선의 역사가 서린 건축물은 그저 장사에 방해되는 옛날 건물에 불과했던 것이었다. 하등 중요하지 않았다.

 

 

 

 



‘내가 태어났을 무렵은 합방 후 20년이 가까웠다. 도시는 정돈되고 주택지도 한적하여 아이들이 급격한 변화를 느끼지 못할 만큼 정치적으로 안정된 상황 하에 놓여 있었다. 사과 과수원에는 하얀 꽃이 피었다. 공원은 잔디가 덮여 있었고, 아이들은 운동장과 수영장에서 놀았다. 골프장도 있고, 수도, 전기, 전화 등으로 근대화된 생활을 대부분은 일본인이 누리고 있었다.’



일본인의 눈에 비친 대구는 번영하고 번성하고 있었다. 그러나 다 그런 건 아니었다. (작가도 언급했듯 근대적 시설은 대부분은 일본인의 것이었다.) 대구 인근의 어느 마을에서 살았던 한 사내는 살기 힘들어 만주로 떠났다. 십여 년 후 대구에 돌아와 고향에 들렀다가 이런 풍경을 목격했다.

 

 

 




“썩어 넘어진 서까래, 뚤뚤 구르는 주추(주춧돌)는 꼭 무덤을 파서 해골을 헐어 젖혀 놓은 것 같더마. 세상에 이런 일도 있는기오? 백여 호 살던 동리가 십 년이 못 되어 통 없어지는 수도 있는기오, 후!” - 현진건, ‘고향’



그는 대구도 방문했다. 대구에서 특별한 인연을 가진 여자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고향을 떠난 사이 그녀는 매춘부로 살다가 겨우 풀려난 즈음이었다.

 

 

 

 



‘빈터만 남은 고향을 구경하고 돌아오는 길에 읍내에서 그 아내 될 뻔한 댁과 마주치게 되었다. 처녀는 어떤 일본 사람 집에서 아이를 보고 있었다. 궐녀(그여자)는 이십 원 몸값을 십 년을 두고 갚았건만 그래도 주인에게 빚이 육십 원이나 남았었는데 몸에 몹쓸 병이 들고 나이 늙어져서 산송장이 되니까 주인 되는 자가 특별히 빚을 탕감해 주고 작년 가을에야 놓아 준 것이었다.’ - 현진건, ‘고향’



식민지로 넘어온 일본인들의 대구와 조선인들이 살아낸 대구의 풍경은 사뭇 달랐다. 신천을 일본인들이 대구천이라고 부르는 사이 조선인들은 고집스레 신천이라고 옛 지명을 바꿔 부르지 않은 것처럼. 같은 공간에서 서로 다른 삶을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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