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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타 폰 주트너

베르타 폰 주트너 하버드는 왜 그럴까? 베르타 폰 주트너(1843-1914).독일 출신으로 1905년 노벨평화상을 탔다. 여성으로서는 최초의 기록이었다. 유로화가 통용되기 전에 오스트리아의 가장 고액지폐인 1000쉴링에 얼굴이 실렸고, 현재는 2유로 주화에서 그의 얼굴을 볼 수 있다. 이 여성은 대한제국 혹은 조선에 중요한 사건이 벌어질 때마다 목소리를 높였다. 1909년에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했을 때가 특히 그랬다. 그 사건은 유럽을 충격에 빠뜨렸다. 그런데 그 이유가 우리 생각과 사뭇 다르다. 당시 이토 히로부미는 세계적으로 인정을 받는 거의 유일한 아시아 정치인이었다. 이런 뛰어난 정치인을 잃어버린 것에 대해서 충격을 느끼고 애도하는 분위기였다. 영국은 크게 당황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집단

집단 스승과 제자 김종직은(1431-1492)은 아내를 선비라고 불렀다. 시구에 들어간 단어였다. 김종직이 몸이 안 좋아 집에 있던 날, 아내가 국화주를 내와다. 당시는 흉년으로 술값이 뛴 즈음이었다. 국화주 석 잔을 마시고 나자 시가 절로 흘러나왔던 모양이었다. ‘아내는 참으로 단정한 선비시네 노랑 국화가 향기도 국중의 제일이라네.’ - ‘점필재집 시집’ 제19권 술 한잔 값만은 아니었다. 평소 김종직은 아내에게 예와 정성을 다했고, 아내의 평소 언행과 성품을 존경하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선비와 같았다. 김종직이 결혼생활에 정성을 쏟은 것은 아버지 때문이었다. 아버지 김숙자(1389-1456)는 젊은 시절 집안 어른의 명을 따라 공산 한씨와 결혼해 아들 둘과 딸 하나를 낳았으나, 신분상의 허물이 있..

노예

노예 백인 하인들과 함께 시위에 참가한 흑인 노예들 “직업이 무엇이오?” “직장인... 아니 노비요.” 어느 예능 프로그램에 등장한 장면이다. 공감 버튼을 많이 받았다. ‘온전한’ 자유를 억압받는다는 점에서, 그리고 ‘갑질’에 완벽한 저항이 힘들다는 면에서 요즘 직장인들이 과거의 ‘대감댁 노비’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은 듯. 미국 흑인 노예의 역사를 보면 다양한 형태의 ‘노비’들이 존재했다. 대개는 흑인만 떠올리지만 인종적으로 보면 황인종, 백인도 노비 신세를 변하지 못했다. 이들의 면면을 간단하게 살펴보면 ‘노예’ 혹은 ‘노비’의 실체를 어느 정도 규명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아메리카 최초의 노예들은 원주민이었다. 영국인들은 스페인인들의 선례를 따라 원주민을 노비로 삼았다. 이 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