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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인

인도인 인도인들의 이중생활 ‘이 도시는 국가라는 토양으로부터 난 나무처럼 성장하지 않았다... 마치 시간이라는 조류 위의 거품처럼 떠도는 듯하다.’ - 타고르(1861-1941) 1931년 미얀마 양곤 인구의 절반이 인도인이었다. 중국, 유럽인도 있었지만 외국인 중 인도인의 수는 압도적이었다. 중국은 아시아 곳곳에서 밉상이었으나 미얀마에서만은 달랐다. 인도인에 비해 그 수가 적었던 것이다. 상대적으로 존재감이 미미했다. 인도인들은 영국 제국주의자들의 정책을 따라 양곤으로 이주했다. 이들은 자국에서 식민지 백성이었으나 양곤에서는 상대적으로 우월적 지위를 누렸다. 영국을 등에 업고 버마인(미얀마인)들을 착취하고 있었다. (타고르는 이런 모습에 너무도 깊은 실망을 느꼈다.) 미얀마가 독립했을 때 식민지 시기와..

믈라카

믈라카 국가란 무엇인가 개 한 마리가 쥐사슴을 쫓고 있었다. 자바쥐사슴의 크기는 다 커도 몸무게가 1kg 남짓. 개에게는 한입 거리밖에 안 됐다. 위기의 순간 쥐사슴이 돌연 폴짝 뛰어 개에게 덤벼들었다. 갑작스런 공격에 당황한 개는 강에 빠져버렸다. “그래, 저거야!”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파라메스와라 왕자가 자신도 모르게 외쳤다. 그는 그 작은 쥐사슴처럼 쫓기고 있던 신세였다. ‘말레이 연대기’에 의하면 그는 수마트라 지역의 스리위자야 제국의 왕자였다. 자바의 마자파핫 왕국으로부터 공격을 받아 도망치고 있었다. 그는 새롭게 정착할 곳을 찾아 헤매다 1402년 믈라카에 닿았다. 믈라카는 작은 어촌 마을에 불과했으나 그에게는 쥐사슴처럼 느껴졌다. 크기는 작았지만 지리적 이점이 컸다. 그는 믈라카에 왕국..

아내

아내 무산에 산다는 그녀 ‘아내는 옷에 묻은 술 자국이 많다며 화를 내셨네.’ 목은 이색(1328-1396)이 어느 해 겨울 남긴 기록이다. 과음했다지만 핑계는 있었다. 이름난 재상들과 높은 관리들과 무리를 이루어 공민왕의 무덤인 현릉을 참배했다. 돌아오는 길에 여러 차례 술자리가 있었고 주거니 권하거니 ‘사회 생활’을 하느라 취하도록 마시지 않을 수 없었다. 아내는 이런 남편에게 화를 냈다. 결코 만만치 않은 지위에 명분도 있었지만 ‘무서운 아내’의 지청구는 피할 수 없었다. 이중민이라는 인물이 있었다. 그는 아내의 치마를 바느질해서 꿰맸다. 이 일이 어쩌다 친구의 귀에 들어갔다. 그의 친구 이규보는 멋들어진 시를 지었다. (시는 ‘동국이상국집’ 5권에 남았다.) ‘눈빛처럼 곱네 하얀 비단 치마 밟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