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344

모병제 징병제

모병제 징병제 변명 “당이 한반도에서 물러난 원인은 병력 부족.” 나당전쟁과 관련해 중국의 저명한 역사학자 뤼쓰멘의 설명이다. 중국은 신라와 토번(티벳)이라는 두 나라와 거의 동시에 전쟁을 벌였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저 학자는 이 사실을 토대로 한꺼번에 큰 전쟁을 치르다 보니 ‘실력’보다는 ‘수적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졌다는 것이다. 혹은 신라보다는 토번에 집중하려다 보니 자연스럽게 한반도에서 군대를 철수시켰단 주장이다. 병력이 부족했던가는 모병 기록을 보면 쉽게 파악이 된다. 당시는 부병제를 시행하고 있었다. 부병제는 중세 중국의 북조인 북주에서 시작해 당 시대 중기까지 약 100여 년간 시행했다. 토지를 소유하거나 받은 농민이 병역 의무를 담당하는 제도였다. 당은 부병만으로 원정군 구성이 불가능..

카테고리 없음 2024.03.03

안압지 유래에 대해...

안압지 유래에 대해... 그 와중에 왜? 월지(月池). 경주시 인교동에 있는 신라 시대의 연못이다. 조선 시대 이후 안압지라고 불렀다. ‘삼국사기’ 674년(문무왕 14) 조에는 궁성 안에 못을 파고 산을 만들어 화초를 기르고 진금이수를 양육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연못을 파고 화초를 키우고 기이한 짐승을 길렀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태평성세에 벌어진 유쾌한 사업으로 들린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전혀 아니다. 신라가 가장 힘든 시기에 벌인 공사였다. 전쟁 중이었다. 그것도 당대 세계 최강국이었던 당나라와 결전을 벌이고 있었다. 신라는 672년부터 이듬해까지 전국에 성을 쌓는 작업을 했다. 월지는 이 대대적 축성 작업이 마무리되던 즈음이었다. 이 급박한 시기에 신라는 왜 한가하게 연못을 팠을까? 연못을 구조를 살..

기벌포 전투에 관한 이야기...

기벌포 전투에 관한 이야기... 그들은 왜 차별받았을까 기록은 ‘22회의 전투, 4000명 처단’이 전부였다. 676년(문무왕 16년) 기벌포에서 벌어진 전투에 대한 ‘보고서’였다. 신라가 승리했고, 저렇게 단촐한 (혹은 의문스러운) 승리의 기록만 남겼다. 신라는 기세가 살아나고 있었다. 675년 매소성과 인근에서 벌어진 일련의 전투에서 승기를 잡았다. 이 전투 이후 당군은 더 이상 공세를 이어갈 수 없었다. 철군을 고민해야 하는 입장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갑작스레 남쪽의 기벌포를 쳤다. 기벌포를 장악하면 옛 백제 지역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삼국사기는 전투를 이렇게 설명했다. ‘겨울 11월에 사찬 시득이 수군을 거느리고 설인귀와 소부리주 기벌포에서 싸웠는데 연이어 패배하였다. 다시 나아가 크게 작게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