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치
마음의 고향
과잉의 시대다. 과잉은 쓸모 있는 것마저 쓸모없는 것으로 만드는 위력이 있다. 이 허탈한 굴레는 ‘터미네이터’처럼 스스로 생명력을 가지고 광고를 활용해 자기 몸피를 불리는 자본이다.
우리는 자본의 굴레 아래서 하루 종일 일을 하고 무언가를 생산하지만 그것이 정확히 어떤 쓸모나 가치가 있는지는 알지 못한다. 필요에 의한 소비가 아니라 소비를 위한 소비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이런 류의 생산 활동은 인간에게 어떤 보람을 주기는 힘들다. 생산과 소비 모두 다이어트가 필요하다.
그래 그런지 사람들은 내 노동이나 돈의 구체적인 ‘쓸모’에 집착하는 듯하다. 그런 텔레비전 프로그램이 인기다. 대표적인 프로가 ‘삼시세끼’(TVN)이다. 이 프로에는 씨앗을 뿌려서 거둔 곡식과 채소로 음식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공급한다. 음식을 만들어서 대접하기까지의 과정 모두 공개된다. 그것도 결국 노동이지만 우리가 일상에서 시달리는 노동과는 뭔가 때깔이 달라 보인다.
요컨대 그것은 마치 고향 풍경 같다. 시골에서 촬영하기 때문에 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에게 고향은 생산자와 소비자가 공존하는 공간이었다. 쌀 농사를 지어서 시장에 내다팔기도 했지만 아버지가 키운 벼로 어머니가 밥을 짓고, 자식들이 둘러 앉아 식사를 했다.
때로 아버지가 못과 망치를 들고 아이들의 책상을 만들기도 하고 비가 새는 지붕을 막았다. 노동이 우리에게 직접적인 기쁨과 보람을 줬다. 그것이 고향이다.
‘삼시세끼’에서는 그런 고향이 재현된다. 생산과 소비가 한 공간 안에서 이루어지고, 내가 흘린 땀이 열매로 맺히고 사람들의 배부르고 즐거워하는 장면을 목도한다. 이것은 경제가 산업화 하고 대량으로 생산해 ‘낯모르는’ 이들에게 대량으로 공급하는 제조업이 핵심 경제로 자리 잡으면서 잃어버린 풍경이었다.
우리는 전체를 파악할 수 없는 한 개의 점으로 세상을 살아왔다. 내가 맡은 ‘점’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고민할 필요나 여유가 없었다. 중요한 것은 노동의 대가로 받는 돈이었다. 내가 만든 물건이 어떻게 쓰이는지 무슨 작용을 할 것인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그것이 환경을 파괴하든, 사람들의 건강을 해치든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일은 일’일뿐이니까. ‘나’는 거대한 공장의 일부일 뿐이니까.
그 사이 우리는 일이 가져다주는 구체적인 보람보다는 돈 자체에 집착하게 되어버렸다. 내 자식에 들어갈 쌀을 키우는 아버지의 보람은 잊혀졌고, 그저 내 주머니로 가져오는 재화의 총량만이 중요해졌다. - 보상이 적으면 그것은 ‘가치’에 상관없이 하찮은 일이 되어버렸다. 돈이 곧 보람이 되고 말았다.
그 결과 우리는 고독한 피로에 시달린다. 단절된 공간에서 ‘나’의 소득을 위해 매진할 뿐 타인의 기쁨이나 고통과 무관한 삶을 산다. 나는 홀로 인내하고 고통을 참아가며 무언가를 이루고 그것에 만족한다. 완벽하게 고독한 삶이다. - 그런 삶을 강요받으며 살았다.
혹자의 말마따나 ‘그저 세끼 밥 지어먹는 게 전부’인 프로가 이토록 인기를 끄는 것은 인간의 가장 내밀한 욕망을 자극하는 무언가가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같이 씨앗을 뿌리고 밥을 짓고 나누어 먹는 모습을 보면서 시청자들은 일의 의미와 보람, 진정한 관계 같은 우리가 잃어버린 가치들 (혹은 쓸모없다고 여긴 것들)이 푸른 상춧잎처럼 싱싱하게 살아나는 것을 목도하는 게 아닐까.
‘인생은 돈놀이로 전락하고, 모든 것이 장사꾼들의 상점으로 변질된다. 잡지 편집실과 정치 집회, 심지어 가정조차 예외가 될 수 없다.’
- 알렉산드로 게르첸(러시아, Aleksandr Gertsen, 1812~1870)
200여 년 전이 저러했다면 지금은 말할 것도 없다. 더더욱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풍경’과 멀어진, 그래서 그것을 미치도록 그리워하는 세상인 것이다. ‘삼씨세끼’가 ‘미친 시청률’을 기록하는 까닭이다.
참고>
한병철, 김태환 옮김, <피로사회>, 문학과지성사, 2012년
누치오 오르디네, 김효정 옮김, <쓸모없는 것들의 쓸모 있음>, 컬처그라퍼, 201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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