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벌포 전투에 관한 이야기...
그들은 왜 차별받았을까
기록은 ‘22회의 전투, 4000명 처단’이 전부였다. 676년(문무왕 16년) 기벌포에서 벌어진 전투에 대한 ‘보고서’였다. 신라가 승리했고, 저렇게 단촐한 (혹은 의문스러운) 승리의 기록만 남겼다.
신라는 기세가 살아나고 있었다. 675년 매소성과 인근에서 벌어진 일련의 전투에서 승기를 잡았다. 이 전투 이후 당군은 더 이상 공세를 이어갈 수 없었다. 철군을 고민해야 하는 입장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갑작스레 남쪽의 기벌포를 쳤다. 기벌포를 장악하면 옛 백제 지역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삼국사기는 전투를 이렇게 설명했다.
‘겨울 11월에 사찬 시득이 수군을 거느리고 설인귀와 소부리주 기벌포에서 싸웠는데 연이어 패배하였다. 다시 나아가 크게 작게 22번 싸워 이기고 4,000여 명을 목 베었다.’
당은 함대를 가지고 있었다. 대형선을 비롯해 중형선과 소형선, 구급선, 정찰선, 특수선을 갖추었다. 이에 비해 신라는 구성이 미미했다.
당나라는 일련의 전투에서 5분의 1에 해당하는 병력을 잃었다. 이후 서해상에서는 당군의 군사 활동이 감지되지 않았다. 기벌포 접전을 계기로 신라가 서해를 완전히 틀어쥐었다.
이 즈음 백제의 옛 군사들과 유민들은 온전히 신라에 굴복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당과 신라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고, 한동안 신라가 밀리는 형세가 이어졌다. 납작 업드렸던 백제인들의 마음이 술렁였을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김유신이 죽은 후 아찬 대토가 모반을 일으킨 사건을 봐서도 알 수 있다. 신라가 흔들리면서 백제 유민의 민심은 요동을 쳤다.
당나라 군대 안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던 듯하다. 당의 군대에는 백제 장수가 다수 있었다. 대표적인 인물이 흑치상지였다. 옛 백제 영토의 민심이 동요되는 상황에서 흑치상지를 비롯한 백제 출신 군인들의 활동이 활발하게 일어났을 가능성이 높다. 이들은 신라의 영향권 아래 있는 백제인들과의 호응을 염두에 두고 기벌포로 향했을 것이다.
백제인들의 몸부림은 고구려인과 또 다른 측면이 있었다. 백제 유민들은 고구려 유민과 비교해 차별 대우를 받았다. 백제와 신라 사이의 감정의 골이 깊은 까닭이었다. 대야성 전투의 악연을 비롯해 백제 부흥군이 벌인 3년간의 투쟁, 당이 설립한 괴뢰정권(웅진도독부) 등으로 신라는 백제 유민을 멀리할 수밖에 없었다.
백제인들은 매소성에서 당이 패배한 후 대거 고향을 버렸을 가능성이 높다. - 신라가 무너질 수도 있다는 희망이 사라졌으므로. 당의 두우가 저술한 ‘통전(通典)’에 의하면 신라가 백제 땅을 점령한 이후 백제인들이 돌궐과 말갈로 흩어졌다고 기록했다. 그때가 677년 2월, 옛 백제 땅의 유민들은 그 이전에 돌궐과 말갈에 스스로를 의탁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들은 바다를 건너 요동으로 이주했다.
(675년에서 676년 사이에 일어난 유민들의 이동과 함께 676년 2월에 웅진도독부가 요동반도의 건안고성으로 옮겨졌다. 건안고성에서 백제인 자치구가 형성됐다. 신성의 소구려와 비슷한 형태였다. 백제와 고구려 자치구는 8세기 중반~9세기 초 요동에 진출한 발해에 흡수되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기벌포 전투가 새롭게 보인다. 당군은 백제 출신 군인과 유민을 이송하는 작전을 벌였던 게 아닐까. 당시 백제인들은 당, 백제 부흥군, 신라군으로 갈라져 있었다. 당에 협조하는 사람들이 싫어서 신라군에 적극 가담하는 식이었다. 기벌포에는 당에 우호적이거나 부흥군 활동을 했던 이들이 몰렸을 것이다. 신라에 투항할 의사가 전혀 없는 ‘포로’들이었다. 신라는 이들을 잡아가기보다 즉시 사살하는 편을 택했을 것이다. 그 결과 함선이나 장수, 군수품 피해 없이 사실 4,000명이라는 기록만 남았던 게 아닐까. 고구려와는 또 다른 백제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참고>
이상훈, <나당전쟁 건곤일척의 승부>, 역사산책, 2023년
* 부여융(扶餘隆, 615년 ~ 682년): 마지막 왕인 의자왕의 아들. 660년 7월 백제의 왕성이 나당 연합군에게 함락된 후 왕족·귀족들과 함께 당의 수도인 뤄양(洛陽)으로 끌려갔다. 백제 부흥 운동을 종식시킨 후 백제 유민들을 안집(安輯)하려는 당의 구상에 따라, 663년 9월 당나라 장수 손인사(孫仁師)와 함께 백촌강전투에 참전했다. 웅진도독의 자격으로 664년 2월 당나라 장수 유인원(劉仁願)이 주재한 가운데 웅령(熊嶺)에서 신라의 김인문(金仁問)과 서맹(誓盟)을 했다. 백제의 옛 땅에 대한 웅진도독부의 지배권을 신라로부터 인정받은 후 옛 백제의 귀족·관료들을 중심으로 1도독부 7주 51현제를 백제의 옛 땅에 실시했다. 그 뒤 신라가 백제의 수도였던 사비성(泗沘城)에 소부리주(所夫里州)를 설치해 백제의 옛 땅에 대한 지배권을 장악했다. 한반도에서 축출된 웅진도독부는 677년 2월 만주의 건안고성(建安故城)으로 옮겼다. 이 곳에서 그는 백제 유민들을 안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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