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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뉴스 대응

프로시안 2021. 5. 4. 20:33

가짜 뉴스 대응

 

 

 

 

 

 

 

 

 

 

 

 

 

18세기 ‘가짜뉴스 대처법’



“온통 기레기에 가짜뉴스 천지구만!”



100% 맞는 말은 아니다. ‘내 건 무조건 진짜, 네 건 들을 것도 없이 가짜뉴스’라고 우기는 사람도 적지 않기 때문이다. 가짜뉴스의 역사는 길다. 너무 멀리 가면 밑도 끝도 없을 것이고 ‘뉴스’라고 지칭할 만한 시대부터 시작해도 마찬가지다. 진짜와 가짜는 그의 동시에 태어났다.

 

 

 

최초의 언론은 16세기 말에 탄생한 ‘뉴스레터’다. 뉴스레터를 전문적으로 쓰는 사람을 ‘뉴스레터 기자’라고 했다. 기자라기보다는 첩보원 혹은 정보원 같은 느낌이 든다. 이들은 이탈리아의 대도시에서 출현했다. 이들은 자신이 입수한 믿을만한 정보를 손편지로 써서 유럽 전역으로 발송했다. 독자는 정치인부터 사업가까지 다양했다. 수고가 많이 드는 만큼 구독료가 높았다. 기자들의 신뢰도는 높을 수밖에 없었다. 인맥은 상상 이상이었고, 인맥을 바탕으로 한 신뢰도로 활동을 이어갔다.

 

 

 

 



이들의 활동이 방해받기 시작한 것은 1439년 이후였다. 구텐베르크가 활판 인쇄술을 유럽에 가져온 해였다. 이때부터 인쇄물 제작 비용이 뚝 떨어졌다. 이를테면 1450년에 책 한권을 사려면 몇 달치 임금을 모아야 했으나, 150년 뒤인 1600년에는 책값이 하루 임금보다 낮아졌다. 세상이 뒤집어졌다. 1605년, 인쇄술과 우편이 프랑스 스트라부르그에서 한줄기로 합쳐졌다. 요한 카롤루스가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그는 책 제작업자로 뉴스레터를 부업으로 하고 있었는데 손편지와 인쇄기를 합쳤다. ‘신문’의 탄생이었다. 그렇게 신문이 탄생한 뒤 17세기 독일에서만 200개의 신문이 창간했다.



“쓸데없는 발명품. 어떻게 믿어!”



‘손편지 뉴스레터’의 발상지 이탈리아인들의 반응이었다. 당시의 상황을 들여다보면 그럴 만도 했다. 정보에 굶주린 대중은 열광했으나 동시에 조롱과 멸시하는 이들도 많았다. 정보의 신뢰성 때문이었다. 특히 유명인들 혹은 권력자들은 ‘거짓 뉴스’를 두려워했다. 연예인들이 악플과 찌라시를 두려워하듯이.

 

 

 

문제는 진짜 가짜 할 것 없이 뉴스라고 하면 무조건 덮석 물고 보는 대중이었다. 이를 뉴스중독이라고 했다. 경멸이 담긴 단어였다. 독일과 네덜란드에서 뉴스중독를 가리키는 단어가 생겨났다. 영국의 극작가 벤 존슨은 뉴스에 대한 풍자를 작품에 담았다. 1620년에 선보인 ‘달에서 발견된 신세계에서 온 소식’, ‘신문 제작소’가 그런 류의 작품이었다. 프랑스 학자 아드리앵 바예는 1685년에 ‘로마제국 멸망에 뒤이든 수백 년에 못지않은 야만시대로 퇴보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쏟아지는 서적 때문에. 이는 1세기의 로마 철학자 세네카의 “책이 넘쳐나면 정신이 산만해진다”는 철학을 고스란히 답습한 발언인 듯하다. ‘정보의 홍수’ 운운하는 요즘과 크게 다르지 않다. (매일 아침저녁으로 종이신문으로 정보를 접하던 이들에게 휴대폰에 수시로 뉴스가 뜨는 이 시대는 분명 ‘정보의 홍수’ 시대다.)



시대를 경멸하는 목소리도 터져 나왔다. ‘기레기’, ‘가짜뉴스’ 운운하는 목소리들이었다. ‘손편지 뉴스레터’의 독자는 뉴스 생산자와 소비자 모두 소수의 엘리트였고 정보의 신뢰성이 중요하게 여겨졌다.



 

 

 

 

반면 기사가 흘러넘치는 인쇄물은 다른 이야기였다. 어느 소책자에는 이런 뉴스가 실렸다.



‘기괴한 뱀 또는 용이 최근 발겨노디어 아직 살아 있으며 강력한 맹독으로 주민과 가축을 살육하여 큰 골칫거리를 안기고 있다는, 호샴에서 2마일 떨어진 서식스의 세인트레너드 숲에서 바로 이달, 1614년 8월에 일어난 사건 이야기다.’



존 트런들이라는 출판업자 특종보도한 내용이었다. 요지는 키가 9척인 용이 출연했다는 이야기였다. 그는 엄연한 실화라는 점을 거듭 강조했다.



이들을 가장 꺼린 이들은 기존의 권력자들이었다. 혹시나 자신들과 관련된 가짜 뉴스가 퍼져나가지나 않을까 두려워했다. - 혹은 원하지 않는 뉴스가 널리 퍼지는 것을 경계했다.



신문과 함께 한 가지 요소가 덧붙여졌다. 커피였다. 뉴스는 커피 하우스에서 다시 폭발적으로 발을 달고 사람들 사이로 퍼져나갔다. 이들 사이에 오간 말이 다시 뉴스로 생산되었을 것이다.


 

 

 

 


1600년대 말 영국의 왕은 내전(청교도혁명)과 왕정복고 직후 혼란기에 뉴스와 커피하우스로 나라가 더욱 어수선해지는 것을 막고대 나름의 대책을 세웠다. 인쇄기를 규제하는 법을 만들었고, 왕의 군대는 불법 인쇄기를 적발할 수 있는 수색 권한을 부여받았다. 찰스 2세는 1675년 겨울에 “커피하우스 금지에 관한 성명”을 발표했다. (그러나 런던의 명망가들이 강력하게 저항했고, 며칠 뒤에 금지령은 철회됐다.)



가짜 뉴스 금지법도 발의됐다. 1688년 10월, 제임스 2세가 시도한 일이었다. 그는 ‘허위 소식 전파 억제’에 관한 성명을 발표했다. ‘허위 소식을 전파하는 자’, ‘악의적인 중상모략을 자행하는 자’, 그중에서도 ‘사람들을 선동해 국왕 및 정부 체제에 반감을 품게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말하거나 인쇄물을 만드는 자를’를 처벌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제임스 2세는 한 달 남짓 후에 딸에게 쫓겨 나라를 떠났다. 명예혁명이었다.


 

 

 

 

가짜 뉴스를 차단하는 진짜 방법은 뭘까? 이른바 ‘개소리 순환고리’를 끊는 방법. 1734년 영국의 출판사인 ‘크라프츠먼’은 이렇게 주장했다.



“그릇된 정보가 한번 어느 신문에 실리면, 사정을 잘 아는 누군가가 신속하게 반박하지 않는 한 나머지 신문에도 모두 실리는 게 보통이다.”



신속한 반박이 답이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 기사에는 기사. 18세기에 나온 가짜뉴스 대처법이자 지금까지도 유용한 방법이다.



 

 

 

 

 

참고>

톰 필립스, <진실의 흑역사>, 홍한결 옮김, 윌북, 2021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