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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류사랑

프로시안 2022. 2. 25. 11:29

한류사랑

 

 

 

 

전쟁이 가져온 뜻밖의 현상



“임진왜란은 조선에서 왜병을 끌어들여 중국을 침범하려는 술책.”



1598년 명나라 병부주사 정응태가 내놓은 주장이었다. 조선에서 중국어에 능통한 이정귀를 파견했다. 그는 ‘무술변무주’라는 문서를 작성해 명나라에 제출했다. 결국 정응태는 파직됐다.



이때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이정귀의 이름이 명나라에 널리 알려진 것이었다. ‘무술변무주’의 문장이 뛰어나다는 소문이 나면서였다. 이후 여러 차례 중국을 방문하는 동안 그는 늘 명사 대접을 받았다. 그것도 중국의 난다긴다하는 유력한 문인들 사이에서.



‘납일에 강을 지나는데 진강에 있는 유격 구탄이 하루 전에 의주로 편지를 보내어 내가 오는 날이 언제인지 물었다. 그리고는 이날 저녁 강진성의 십 리 밖까지 나와 우리를 마중했다. 그는 우리가 머무는 집 곁에 장막을 성대하게 설치하고 심지어 채붕을 설치하여 온갖 놀이를 벌여 우리를 즐겁게 해주었으며 군악을 벌이고 많은 음식을 차리는 등 예의를 다하여 매우 정성스럽고 융숭하게 대우해 주었다.’


 

 

 


1616년 이정귀가 북경 사진으로 가는 길이었다. 이 일지에 등장하는 구탄이라는 인물은 비록 국경에서 낮은 벼슬을 살고 있었으나 당시 명나라 문단에서 주류 중의 주류로 여겨지던 공안파를 창립하는데 기여했고 동시에 중요 멤버였다. 벼슬살이에 별 관심이 없어서 한직을 전전했던 것일 뿐, 명성으로만 치면 상당한 영향력을 가진 인물이었다.



그런 구탄이 십리 밖까지 나와서 이정귀를 맞이하고 장막을 설치해 그 안에서 군악 연주도 하고 음식까지 대접했던 것이었다. 구탄의 요구 사항은 하나였다.



“시를 지어달라.”



구탄뿐만이 아니었다. 가는 곳마다 시를 한 수 달라는 요청이 빗발쳤다.

 

 

 



이들의 염원이 하늘에 닿은 것일까. 중국 문인들이 이정귀를 마음껏 접촉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1926년 이정귀가 네 번째로 북경에 갔을 때 병 때문에 6달이나 머물러야 했다. 이정귀가 북경에 있다는 소식에 각지에서 그를 만나러 왔다.



병으로 집에서 몇 년째 쉬고 있던 명나라 관리 하나는 이정귀에게 자신의 뜻을 전할 만한 관리에게 간곡한 편지를 보냈다. 그는 이렇게 썼다.



‘듣자하니 고려의 명현이 도성에 오래도록 머무는데 붓을 휘두르면 사람을 놀라게 하는 문장을 짓는다고 합니다. 저는 생전에 그 문하에 가서 가르침을 받지 못할 형편인데... - 중략 - 모쪼록 이 부채에 몇 자 적어 주도록 잘 말씀해 주시어 눈만 마주쳐도 도가 통하는 뜻을 기록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이뿐 아니었다. 명나라 황제의 외손자를 가르치고 있던 사람이 만나러 오기도 했고, 임진왜란 때 평양성 전투에 참전했던 장군의 아들이 아버지의 이름에 의지해 그를 방문하기도 했다. 혹자는 숙소로 음식을 보냈고, 그의 이름을 물론 시를 줄줄 외우기도 했다.



이정귀의 명성은 조선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 그 덕에 북경으로 사신에 같다가 새로운 ‘한류 스타’ 대열에 합류한 이들도 적지 않았다.



조선 문인의 글은 베트남까지 전해졌다. 이수광은 ‘지봉유설’에 ‘조완벽전’ 즉, 조완벽이라는 사람의 이야기를 남겼다. 조완벽은 정유재란 때 일본군 포로로 잡혀갔다가 일본인의 종이 되어 베트남(안남)까지 갔다 온 인물이었다. 그는 베트남에서 그 나라 유생들이 이수광의 시집을 들고 다니며 외우는 것을 목격했다. 조선에 귀국해 그가 보고 들은 광경을 본인에게 전한 것이었다.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책 하나를 꺼내 보여주며 말했다. ‘이것은 귀국의 재상인 이지봉이 지은 것이오. 우리나라의 여러 유생들마다 이것을 가려 뽑아서 외우고 있으니, 그대로 한번 보시오.’ 목숨이 조석에 달린 사람이라 살펴서 기록할 마음이 없었지만, 종이와 붓을 달라고 하여 다만 몇 편을 베끼고 배로 돌아왔다. 그 후에 학교 안의 여러 유생을 보니 과연 이 책을 옆구리에 끼고 있는 자들이 많았다.’



조완벽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이수광의 뇌리를 스치는 기억이 있었다. 그는 1597년 명나라 사신으로 갔다가 사신들의 숙소(옥하관)에서 50여일을 머물면서 베트남 사신을 만났다. 그의 이름은 풍극관으로, 이수광은 베트남 사신과 필담을 나누며 시를 주고받았다. 풍극관은 이수광에게 말했다.



“귀대국은 예전부터 문화의 나라로 일컬어졌으니, 우리나라가 감히 미칠 바가 아닙니다.”



이수광은 또 ‘조회 때 우리나라 사신은 앞줄에 첫 번째로 섰고, 안남 사신은 뒷줄에 섰으므로, 서로 접할 때마다 매양 공손한 뜻을 표하였다.’고 썼다. 그만큼 조선 사신의 위상이 높았던 것이었다.



풍극관은 ‘문화의 나라’에서 온 사신에게 받은 시를 베트남에서 책으로 펴냈고, 그 안에 담긴 시들은 곧장 유생들 사이에 읽히고 암송되었다. 중국을 딛고 베트남까지 문화 한류가 퍼진 셈이었다. 이정귀도 이 사실을 듣고 ‘지봉집’ 서문에 “공이 세상에 있을 때부터 공의 시가 이미 천하에 두루 퍼져 안남이나 유구의 사신들도 공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라고 기록했다.



이수관은 유구국 사신과도 만났다. 그들의 이름은 채견과 마성기였다. 이수광은 그때의 기억을 다소 으쓱해하는 문투로 술회했다.

 

 




‘우리 일행이 객관에 도착한 뒤로부터 유구 사신은 제법 은근한 뜻을 전하면서 우리가 지은 시문을 얻어 보배로 삼기를 원하였다.’



심지어 태국 사신과도 만났다. 그는 시를 두 수 지어주었으나 답은 없지 못했다. 태국은 한자를 쓰지 않았다.



조선의 시와 문장을 전한 이들 중에는 군인들도 다수 있었던 듯하다. 임진왜란 때 유생들이 대거 군인으로 조선에 왔다. 그중에는 문화가 발달한 중국 강남 지역에서 온 이들도 많았다.



1597년 파병된 인물 중에 오명제라는 유생이 있었다. 그는 군인으로 조선 땅을 밟았으나 한시를 부지런히 모아서 ‘조선시선’이라는 시집을 만들어 중국인들에게 소개했다. 그는 허균의 집에서 지냈는데, 시를 모을 때 그의 도움을 받았다.



허균은 1609년 북경으로 가는 길에 누군가 허난설헌의 시집을 구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그는 중국에서 문장과 필법으로 명성이 높았던 주지번을 통해 허난설헌의 시가 뛰어나다는 말을 들었다고 전했다. 주지번은 사신으로 왔다가 허난설헌의 시를 전해받고 중국에서 ‘허난설헌집(許蘭雪軒集)’으로 출간한 인물이었다. 조선의 시와 문장이 그만큼 높은 평가를 받았던 것이다.



최근 ‘오징어게임’ 열풍이 불고 있다. 이런 현상이 가능하려면 두 가지가 필요하다. 상품을 유통시킬 플랫폼이다. 조선의 한류는 임진왜란이 그런 역할을 했다. (일본은 통신사.) 여기에 뭐든 작정하고 뛰어들면 웬만큼 해내는 한국인의 경쟁적 기질도 한몫 한다. 조선의 한류는 전쟁과 구성원들의 뛰어난 자질이라는 두 가지 요소가 만나 일어난 문화 현상이었다.



참고>

안나미, <조선 금수저의 슬기로운 일상탐닉>, 의미와재미, 2021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