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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병제 징병제

프로시안 2024. 3. 3. 23:18

모병제 징병제

 

 

 

변명

 

 

당이 한반도에서 물러난 원인은 병력 부족.”

 

나당전쟁과 관련해 중국의 저명한 역사학자 뤼쓰멘의 설명이다. 중국은 신라와 토번(티벳)이라는 두 나라와 거의 동시에 전쟁을 벌였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저 학자는 이 사실을 토대로 한꺼번에 큰 전쟁을 치르다 보니 실력보다는 수적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졌다는 것이다. 혹은 신라보다는 토번에 집중하려다 보니 자연스럽게 한반도에서 군대를 철수시켰단 주장이다.

 

병력이 부족했던가는 모병 기록을 보면 쉽게 파악이 된다. 당시는 부병제를 시행하고 있었다. 부병제는 중세 중국의 북조인 북주에서 시작해 당 시대 중기까지 약 100여 년간 시행했다. 토지를 소유하거나 받은 농민이 병역 의무를 담당하는 제도였다.

 

당은 부병만으로 원정군 구성이 불가능하면 병력을 보충했다. 670년 설인귀가 지휘한 나사도행군을 편성할 때 따로 병사를 모으지 않았다. 나사도행군은 4월에 편성 7월 대비천에서 토번에서 크게 패배했다. 당은 한반도에 보낸 이근행ㆍ고간의 병력을 불러들이지 않고 다시 9월에 양주도행군을 편성해 토번 전선에 보냈다. 이때도 병력을 따로 모으지 않았다. 당 나라는 중국답게 인력 하나는 충분했다.

 

당은 원정이 익숙한 나라였다. 원정이 당의 패권을 가능했기에 시스템화되어 있었다. 당 태종은 629 10만의 대군을 전쟁이 투입한 뒤로 매년 4~5만에서 10만의 대규모 군사를 동원했다. 당 고종 시기에는 30~40만 명 이상의 군사를 동원했다. 현종까지도 마찬가지였다. 부병이 바탕이었고 부족할 시에는 모병과 번병 활용을 통해 인원을 충당했다. 당은 683년 고종이 사망하기 전까지 충분한 군사 동원 능력을 유지했다.

 

원정은 익숙한 일이었다. 당은 토번을 제압하는데 설인귀와 강각을, 고구려 부흥운동에는 고간과 이근을 파견했다. 670년까지 당은 토번과 신라 모두를 제압하는 계획을 짜고 있었다. 패권국의 자신감이었다. 676년 수도가 위협받는 상황이 처하기 전까지 이런 자신감은 변함이 없었다. 그 이전까지 신라군과의 전투에서 병력 부족에 시달렸다는 정황(모병 등)이나 전략적 상황은 발견되지 않는다.

 

참고>

이상훈, <나당전쟁 건곤일척의 승부>, 역사산책, 2023